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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Apr 11. 2019

여행을 싫어해도, 괜찮습니다

발리 신혼여행기

일주일 동안 남자와 단둘이 발리를 다녀왔다. 남사친이 아닌 사랑하는 남자와의 첫 해외여행,  그건 우리의 신혼여행이었다. 평소 여행은 귀찮은 거라며 염불처럼 외우던 그도 이번 여행은 오랫동안 고대했다. 불현듯 여행의 로망이 샘솟았을 리는 만무. 그저 사사로운 선택과 근심이   결혼 준비 과정을 얼른 건너뛰고 공식 피날레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리라. 여행지를 두고 의견을 물어볼 때마다 ‘나한테 여행은 어딜 가도 똑같아.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너와 가면 어디든 좋아’라는 달콤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어쩐지 그 말이 부담됐다. 여느 때처럼 급작스럽게 떠안은 (출장 같은)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랄까. 아끼고 사랑하는 짐덩이를 짊어지고.


“여행 기자에게 좀 약한 여행지 아니에요?” 회사 후배가 물었다. 나라고 꿈꿔온 신혼여행지가 없었겠는가? 지척에서 야생동물이 어슬렁거리는 아프리카 사파리 리조트(그는 동물을 매우 무서워한다), 배와 비행기를 20시간 넘게 번갈아 타야만 닿는 태국의 외딴섬(평소 짐꾼을 자청하기에 그가 캐리어 2개를 들고 이동할 게 뻔하다), 와이파이가 머나먼 얘기처럼 들리는 남미의 도시(모바일 게임을 3개의 기기로 돌리는 사람입니다) 등. 어찌 됐건 이제 막 직립 보행한 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킬 수는 없   .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비행 거리, 둘 다 아직 가보지 않은 도시, 쉼과 활동이 적절히 섞인 곳의 절충은 발리였다.  필라테스에 매진 중이라, 이참에 요가도 배워보고, 수영도 하면서 선베드에 누워 책이나 읽다 올 요량이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 게 눈에 들어오네. 이런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아”


뜻밖이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야자수를 보며 그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첫날 아침, 우리는 새파란 하늘  넓적한 초록 이파리가 쭉쭉 뻗은 야외 수영장을 마주하고 나란히 앉았다. 보리차 맛이 나는 아라비카 커피를 대나무 빨대로 쪽쪽 빨며. 후끈한 공기 틈에 살랑살랑 바람이 일었다.


이제 막 말을 뗀 아이를 보듯 뿌듯했다.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거야.”라고  다.  “아름다운 풍경은 사진과 영상을 보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이런 건 느낄 수 없었네.”라고 받아치는 게 아닌가.             . 그의 말대로 사진과 영상으로 실제보다   을 전할 수 있는 세상이.  에 와 닿은 공기와 바람은 그곳에 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이 아침, 야자수가 바람에 춤을 추는 풍경과 아이스커피로 잠을 깨는 낭만은 그가 상상하는 여행 밑그림이 되리라.


포크로  무섭게 퍼먹고, 8천 원짜리 길거리 마사지에서 호텔 마사지까지 1일 1마사지와 1일 1수영을 칼같이 지키며 일주일을 보, 사실 그는 첫날 아침 큼의 여유를 느끼지 못했다. 좁 도로를 꽉 메운 자동차와 오토바이에 혼을 뺏겼고,      총총거리며 싸돌아 다니는 내 발길을 쫓느라 진을 뺐다.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올까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혹여 소지품을 도난 당할까, 내가 길을 건널 때마다 무섭게 달려드는 오토바이에 치일까 주 살피기 바빴다. 호텔에 잠시  침대에  쪽잠을 잤다. 한국에선 새벽이 오기 전엔 절대 잠들지 않던 그가 10시면 곯아떨어졌다.


“남들이 좋다면, 나도 좋아해야 하나? 난 여행이 힘들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도 즐겁지 않네.  낯선 곳의 분위기 자체가 스트레스인가봐.”


마지막 밤, 그가 미안한 듯 말했다. 결국 내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일정 내내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줬건만, 매번 힘든 기색을 표하는 그가 못마땅했다. 호텔에서 마련해준 캔들라이트 디너를 앞에 두고 나는 와인을 퍼 마, 짜증을 쏟아냈다. 그는 나를 신경 쓰느라, 나는 그를 신경 쓰느라 그 누구의 여행도 되지 못한 여행. 우리의 첫 해외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연신 내 눈치만 보던 그는 그날도 어김없이 10시에 곯아떨어졌다.


한참을 테라스에 앉아 지난 여행을 곱씹었다. 배려라는 명목 하에 서로의 즐거움을 빼앗고 있던 건 아닌지. 뜻대로 여행이 흘러가지 않는 탓을 왜 상대에게 물었는 지. 나의 눈높이로만 여행을 이끈 건 아닌지. 그동안 누군가는 나의 글과 말로 여행이라는 텅 빈 욕망을 강요받은 건 아닌지.


이른 아침부터 깨어 있던 그는 내가 눈 뜨길 기다렸다 듯  달려와 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 와서  보고(그는 술맛을 전혀 모르는 남자입니다), 발리는 인  참 좁고 애들이 운전을 기가 막히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됐고, 스미냑의 노을도  고, 또 이런 부담스러운 호텔 서비스 대접을 언제 받아 보겠어. 나도 나름대로 새로운 걸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어. 그것만 알아줘. 그리고, 브런치에 내 욕 쓰지 마.” 웃음이 났고, 지난 밤에 내뱉은 말들  부끄러워 혼났다.


마지막 날, 체크아웃 전까지 수영장에서  보내려고(수영장이 기막힌 호텔이었거든요) 내려갔는데, 런던에서 온 젊은 남자가 수영장에서 차려주는 플로팅 조식을 먹으며 셀프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혼자 즐기는 사람이 있구나. 저걸 하려고 런던에서 여기까지? 와, 나 저 남자도 너무 새로워. 신기해.” 발리를 떠나기 몇 시간 전이되어서야, 그의 여행이 비로소 시작된 듯 보였다.


“나랑 이제 여행 안 갈 거지?”

“아니 또 같이 가고 싶어. 그지 같아도 좋긴 좋네. 짜증내서 미안했어.”

“다음엔 어디 갈래?”  



instagram/yoomj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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