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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Apr 23. 2019

두려워도 떠나는 마음

오늘도 걱정이라는 짐을 쌉니다

혼자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이민 가방을 사고, 은행과 관공서를 들락날락하는 동안 출국 날짜가 다가왔다. ‘너 안 무섭니? 지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말해. 엄마가 뒤처리는 어떻게든 해 볼게.’ 무작정 런던에서 1년간 살겠다고 선언하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진행이 됐을 무렵, 문득 겁이 났다. 비행기표는 손에 쥐었으나, 쉬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공항 환승객처럼 몸과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표류했다. ‘엄마, 여기가 행복하지 않아. 미안해. 일단 가 볼래.’ 한숨을 고르고 돌아온 답은, ‘그래, 가서 잘해. 우리 딸은 언제나 잘해 왔잖아.’ 고맙게도 부모님은 나의 런던 도피 선언에 대해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서 그랬을 것이다. 주어진 자유만큼 무거운 책임과 두려움이 그곳에도 있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최근 <스페인 하숙>에서 흥미롭게 본 건 순례자끼리의 대화다. 걷다가 무거워서 패딩도 버리고 운동화도 버렸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른 순례자는 그건 두려움을 내려놓은 거라고 첨언한다. 고국에서 이고 지고 온 두려움이 오늘을 걷는 나의 어깨를 짓누른다는 것은 두 발로 고행을 치른 이의 배움이다. 이처럼 단 한 번의 여행이 주는 배움은 강렬하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다는 속단은 위험하다. 비로소 두려움을 내려놓는 법을 몸에 새겼지만, 곧 유비무환의 진리를 깨닫는 여행도 하게 될 테니까. 유명 배우가 끓인 김치찌개보다 짐이 될지 모르는 두려움을 조금씩 비워내길 반복하며 길 위에 선 그들의 ‘진짜 여행’이 궁금해졌다.



2년 전 여름, 핀란드 레이크랜드 지역을 자동차로 여행했다. 레이크랜드는 북유럽의 짧은 여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핀란드의 대표 휴양지다. 무위자연, 물아일체 같은 관념적 사자성어가 호수를 둘러싼 목가적 풍경으로 묘사되는 곳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호수 곁의 아담한 통나무집과 2평짜리 사우나는 삶의 필요한 행복의 질량을 절감하게 한다. 자연을 곁에 두고 사는 그들의 삶을 경험하고 나면 누구나 겸허한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사진은 동행한 김주원 작가님이 남겨주신 것입니다.

레이크랜드의 주요 도시를 1바퀴 돌고, 대망의 마지막 목적지는 헬싱키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포르보(Porvoo)의 펠링키(Pelinki) 군도였다. 인구가 300명도 안 되는 섬은 무민을 탄생시킨 토베 야슨(Tove Jansson) 가족이 대대로 머물던 여름 별장으로 유명하다. 공식 소개는 그렇지만, 실제 찾아가면 관광지 행색이 거의 없는 외딴섬이다.


자동차를 전용 페리에 싣고 섬에 들어서자, 아이를 주렁주렁 안은 호스트 가족이 손을 흔들었다. 호텔이 있을 리 만무한 곳이라, 의심하는 눈초리로 먼저 짐을 풀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들은 구멍이 숭숭 뚫린 오두막으로 안내했다. 동화책 속 다락방을 재현해놓은 것이 꽤 멋스러워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사이, 전기와 난방 없는 대자연 객실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이곳에서 사람이 잘 수 있다고? 순간 뇌리에 스친 수십 가지 걱정이 호스트의 자식들처럼 주렁주렁 나를 둘러쌌다.


결론적으로 1박 2일 동안 그 섬에서 잘 먹고, 잘 놀고, (그 방에서) 잘 잤다. 동서남북을 쉬이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숲을 헤치며 게임을 하고, 노릇노릇 익어가는 순록 고기를 기다리며 영화 같은 노을을 맞이했다. 온 동네 사람이 잔치라도 하듯 몰려와 먹고 마시기를 한참, 나는 그들에게 어떤 두려움에 대해 물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헤매는 외딴섬의 광활한 숲, 동식물의 터전에 인간이 이방인으로 사는 듯한 야생의 삶은 어떠냐고.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를 느끼죠. 우리는 매일 아침, 사방으로 뚫린 숲을 걷고, 탁 트인 바다로 뛰어들 수 있거든요. 두려움은 이곳에 사는 커다란 무스가 주는 게 아니라 꽉 막힌 삶에 있는 게 아닐까요? 거기가 도시든 섬이든.”


5년 전, 스스로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런던행 비행기표를 손에서 놓았다면 어땠을까? 과연 부모님의 말대로 통장에 모아둔 돈이 차곡차곡 쌓여 살림살이가 나아졌을까? 동의할 수 없다. 감히 준비할 수 없는 두려움이라면, 몰아치는 파도를 막으려 애쓰지 않고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생명 진화 역사 속에서 적자가 살아남았듯, 여행에서도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이 자유를 얻는 법이다.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도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어떤 식의 두려움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하더라도 묵묵히 에 올라야 한다. 이는 더 나은 살림살이를 포기하고 여행으로 무수한 돈과 시간을 쓰며 익힌 나의 배움이다.


*혹시 여행 정보가 필요하다면,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서 레이크랜드 기사를 찾아보세요. 김주원 작가님의 멋진 사진과 함께 자세한 여행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lonelyplanet.co.kr/magazine/articles/AI_0000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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