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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May 12. 2019

여행으로 먹고 산다는 것

직업 여행가의 배부른 고민

“기계적으로 일하는 제가 싫었어요.”


며칠 전, 퇴사한 이유에 대해 누군가 물어서 구구절절한 사족을 삼키고 답했다. 말의 행간을 읽었던 이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더 해왔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니, 과연 나는 ‘기계처럼’ 일을 완벽히 수행했던 사람이었을까, 입력된 일만 반복적으로 수행하다 과부하 난 '기계' 였을까, 하게 됐다. 분명 그녀가 던진 질문에는 여행 업에 관한 동경심이 깔려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여행 기자는 멀찍이 떨어져 보면 꽤나 환상적인 일이니까. 음, 잠시 개념부터  정리하자면 이렇다.


환상(幻想)

1 현실적으로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2 어떤 사람이나 사실에 대해 근거 없이 덮어 놓고 좋게만 보는 태도.


여행의 업을 환상으로 본다면, 두 번째 뜻풀이가 맞을 것이다. 기가 막히게 좋고, 굉장하고, 엄청난(Fantastic) 일로 보일지 모르나, 그건 아마도 근거 없이 덮어 놓고 좋게만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동경일 것이다. 런던에서 1년을 지내는 동안 여행으로 재산의 2/3를 탕진한 나에게도 직업으로 여행을 이어갈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는 환상 그 자체로 보였으니까.


다시 돌아가, 나에게 기계처럼 일했다는 건, 기계처럼 여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게 나의 여행은 런던에 있을 때와 여행 기자로 일할 때가 확연히 다. 일단, 여행 성향부터 밝혀 보자면, 나는 아주 게으르고, 무턱대고 용감하며, 즉흥적인 감으로 여정을 만드는 여행자다(였다). 그런 여행을 즐기게 된 건, 첫 여행지인 스위스 바젤에서부터다.


매년 6월 바젤에서는 세계적인 아트페어가 열린다. 운 좋게 티켓을 구했고, 가장 저렴한 항공권도 일찍이 사놨지만, 숙소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여유 자금이 있을 때라 값비싼 호텔까지 뒤져보았지만, 예약 가능한 객실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지도만 대충 보고 정한 에어비앤비는 바젤 중앙역에서 15분 정도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시골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하다.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몇몇 주민이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정하게 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마을 배회하는 동안 나는 만물을 새로이 본 사람처럼 들떴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또렷이 들릴 만큼 고요했고, 걸어 다니는 동물이라곤 나랑 고양이뿐인 세상. 잊고 살았던 모든 감각이 소생하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세상 모르게 꽁꽁 숨고 싶을 때온다면 반드시 이곳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나만의 ‘런어웨이 리스트’는 여전히 그곳이 1순위다.


그 후 여러 국가에서 그런 짓(?)을 했다. 리스본에 있을 때는 돌아오는 배 시간표만 확인해 행선지도 모르는 유람선에 올랐고, 1시간 동안 노을만 보고 돌아왔다(그건 인생 최고의 노을이었다). 감을 믿고 걷다 길을 잃어 미련하게 몇 시간을 걸었던 유럽 도시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돈을 받고 ‘일하는’ 여행에선 쉬이 그런 시간허락되지 않았다. 업무라는 게 다 그렇듯, 일로써의 여행도 생산성이 필수다. 정해진 시간 내에 체력과 정신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해야 한다. 여행 기자가 출장지에서 해야 할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깊이 있는 정보 탐색과 순수한 감흥이 민첩하게 반응하려면, 리턴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체력과 맑은 정신을 단단히 비축해야만 한다. 쉽게 말해 멍때릴 시간과 여유를 부릴 에너지는 사치라는 거다. 이렇게 여행가와 여행자의 미묘한 간극을 경험하게 되면, 소위 이 세계의 ‘업자’가 된다. 그 속에서 모두가 자유롭게 유영하며 '여행 업무'를 충실히 해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고충도 꽤 많다. 사람들은 출장이 잦은, 특히 해외여행을 밥 먹듯 하는 이 세계의 업무를 그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데, 이곳에도 노력의 뼈를 깎는 방망이 노인들이 참 많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회의를 갖는 순간이 옵니다. 그건 일시적인 것일 수도,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일 수도 있죠. Come as you are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 말라는 거예요. (중략) 저는 멋져도 가면은 쓰고 싶지 않아요.”


노력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프로 레슬링 선수 존 시나가 한 말이란다(최근에 방탄소년단의 보디가드를 자청했다고). 사실 언젠가부터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스스로 만든 완벽한 여행에 대한 강박이 장애물처럼 다가왔으리라. 사전에서는 ‘회의’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심이라고 정의하는데, 나에게는 여행을 업으로 둔 것에 있어 회의를 갖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과연 여행을 좋아하긴 하는 걸까? 여행을 권할 자격이 있나?” 업자로 일하는 동안 끊임없이 묻고 답했다.  


“스스로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좋아하는 것을 애증 했는데, 지금은 ‘증’을 빼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한참 고민하다 이런 추상적인 말로 뒤이은 질문에 답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감춰진 주어는 여행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서툴고 게으르고 느릿한 여행이었으나 그때 동한 감정은 진하게 남아 나를 여행가로 돌려놓는다. 그렇기에 멋져도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았던 어느 유명인처럼, 나도 직장인의 업을 내려놓고 나로서의 여행을 시작한 게 아닐까? (네, 말똥말똥한 눈으로 답변을 기다리는 이에게 건넨, 사족 길게 붙인 이야기입니다).


여행하는 모든 이가 가면을 벗고 당당히 자신의 여정을 펼쳐 나가길 바란다. 서투르고 가난한 여행도 풍요로울 수 있다. 행복, 사랑 같은 말처럼 여행은 어떤 추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쉽게 재화로 환산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100만 원짜리 패키지여행이 과연 내 인생에 어떤 가치를 주느냐는 떠나보지 않고선 값을 매길 수 없지 않겠는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성비 좋은 맛집이나 관광지 소개를 열심히 해줄 때, 나는 여행이 인생에 어떤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지 전보다 깊게 고민하고 더 큰 목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사진은 미국 뉴멕시코 화이트샌즈 국립공원입니다. 제가 너무나 애정 하는 정수임 실장님(@sooimjung)이 찍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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