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RE Mar 17. 2023

나이가 들어도, 패키지 말고 배낭여행

백발이 되어도 지도 한 장 들고 여행하고 싶다

20대 후반 유럽 여행을 처음 갔을 때 가장 생경했던 장면 중 하나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모습이었다. 새로운 도시로 옮겨 다닐 때마다 친구들은 이미 대학생 때 봤을 이 풍경을 한참 늦은 나이에 접했다는 생각에 살짝 억울한 마음도 있었는데, 길 위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여행자들을 통해 묘한 동질감과 위안을 얻곤 했다. 대체 '여행의 적기'는 대체 누가 정한단 말인가. 그들과 나는 지금 분명 같은 시공간 속에 있지만, 지금 내가 보는 이 풍경과 그들이 보는 풍경은 분명 다르리라. 1년 간 유럽 여러 도시를 천천히 여행하다 보니 만약 내가 좀 더 어렸다면 시간과 돈에 쫓겨 지금과 같은 감흥은 절대 느낄 수 없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 와서 참 다행이다." 어쩌면 나이 지긋한 그 노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카메라에 담긴 수 천장의 여행 사진 속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스웨덴에 갔을 때, 스톡홀름 골목 어귀에서 서서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살피던 어느 노부부의 모습이다. 언 10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여행 잔상 속에 잊히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여행에서의 특정 장면이 인생을 흔들기 시작했다면, 나에겐 스톡홀름 골목에서 만난 그 노부부의 모습일 확률이 높다. 당시에 나는 딱히 뭐가 되고 싶다거나 이루고 싶은 거창한 목표는 없었는데, 저들처럼 평생 자유롭게 여행을 하며 살고 싶다는 인생의 방향키가 새롭게 세팅된 듯하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얘기하자면, 나는 유명한 축구 선수보다는 한때 멋 좀 알았을 것 같은 스타일리시한 노신사들의 천국이 떠오른다. 유럽 남부 특유의 자유분방한 청년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을 만큼 멋진 유럽 남부의 노신사들은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피사체였다. 프라하의 어느 카페에선 롱 캐시미어 코트에 빈티지 비니를 눌러쓴 멋쟁이 할머니를 바라보며, 나도 훗날 저 정도의 멋을 부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남몰래 기록해두기도 했다. 지난 여행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기억을 더듬다 보니 여행하는 노인들의 모습으로 담은 사진들이 어찌나 많은 지. 그들은 전 세계 길바닥에서 배운 삶의 교본이기도 했다.  

작년부터 부쩍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조금만 과도한 스케줄을 소화한 날이면 누가 왔다 간 것처럼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쓱 빠져나가 버린다. 그럴 때면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건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조차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핸드폰처럼 몸에도 배터리 양이 퍼센트로 표기가 된다면 좋으련만, 그러면 어느 시점엔 저전력 모드로 달릴 대안이라도 미리 마련할 텐데. 요즘은 거의 수명이 다한 핸드폰처럼 방전을 막을 도리 없이 순식간에 에너지가 꺼져버리기 일쑤다. 하루이틀 앓고 훌훌 털어내는 가벼운 질병 정도면 오히려 낫겠는데, 떨어진 체력이 정신까지 혼미하게 지배해 버리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비로소 나이가 들어도 열정 있는 삶을 영위하는 인생 후반의 삶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불현듯 "이러다가 체력이 안 돼서 여행을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는 날도 오겠구나. 하아, 그럼 어떡하지?" 나는 무척 두려웠다.


나의 인스타그램 프로필 소개에는 "여행하고 글 쓰면서 늙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이 오랫동안 박혀 있다. 여행 매체를 그만두었을 무렵, 비록 몸 담고 있던 직장은 사라졌지만 앞으로도 나는 계속 여행을 할 것이고 그것을 기록하며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 정한 삶의 방향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체력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위해서는 잇몸이 받쳐줘야 하는 것처럼 늙어서도 여행을 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과 불안정한 두려움에 맞서는 마음가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다. 히말라야를 오를 계획은 (아직) 없지만, 유럽의 골목을 구석구석 찾아 걸어 다니고 하루종일 미술관을 누빌 수 있는 두 다리, 언젠가 도전할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장시간 비행과 슬리핑 버스도 마다하지 않을 체력, 여행지라도 티피오에 맞게 차려입을 수 있는 열정과 패기가 나에겐 필요하다. 돈과 시간만큼 중요한 것이 체력과 마음가짐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앞선 걱정과 우려로 겁먹지 않으며 귀찮음을 무찌르고 무모한 계획으로도 가볍게 떠날 수 있는 마인드 셋을 지금부터 길러야 한다.


며칠 전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난생처음 패키지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는 누군가 이끌어주는 여행도 나쁘지 않더라'라는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결국 '우리도 늙었나 봐 이제'라는 씁쓸한 말들 내뱉고 말았다. 스스로 길을 만든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던 굳건한 믿음은 우리 사이에서도 타협점을 찾아 허물어져가는 듯했다. 유럽에서 배낭을 멘 멋진 노부부 여행자를 떠올리며 상상한 먼 훗날의 여행이 패키지에 끌려 다니는 단체 관광객으로 바뀌는 장면이 떠오르자 나는 좀 아찔했지만(패키지여행과 자유여행의 우위가 아닌, 저에게는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유럽 여행을 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어떤 시기에 필요한 여행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전 세계의 비경이 너무나 많고, 나는 여전히 40대에 느끼는 여행의 감흥은 어떨지 감히 계산하지 못한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늦은 걸음들로 천천히 둘러보는 유럽 골목은 어떨 지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그때를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지구 환경적으로도 필요하지만, 지극히 개인적 사유로서의 '지속가능한 여행'에 대해 나는 지금부터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해 볼 계획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0년 만에 부모님을 모시고 떠난 낯선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