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30km로 산다는 것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by NORE
지금 혹시 멈춰있다고 생각하나요?

의사는 물었다. 팽팽하게 잡고 있던 끈이 '툭' 끊어진 어느 날.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손이 아릴 만큼 꽉 잡고 있던 끈을 스스로 놓아버렸을 때의 허탈함. 얼마나 힘을 꽉 쥐고 있었던 지 빨갛게 눌린 손바닥에는 여전히 팽팽한 진동이 남아 있다. 그 진동의 여파로 제자리에 멈춰 서 버린 나. 일상이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겠는 심정. 당장 내달리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다리를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불구의 마라토너처럼 내 안의 동력과 감각이 일시 정지한 상태.


매일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다이어리에 적으며 어쩐지 데일리 박스가 꽉 차는 날이면 뿌듯하게 느껴졌었다. 스스로에게 과업을 주면서 그게 꽤나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증명서처럼 느껴졌다. 더 빨리, 좀 더 앞으로, 마치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만이 나의 숙명인 것처럼 매일이 피곤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 : 돈 버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 :..........

내가 하기 싫은 일 :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거북한 부탁을 강요하는 일


올해 초, 다이어리 첫 장에서부터 나는 무너졌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거침없이 '돈 버는 일'이라고 써 놓고, 하고 싶은 일에는 선뜻 펜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펜을 내려 놓았다. 에픽하이 <빈차> 노래 가사의 엔딩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해야 할 일

돈 버는 것 말고 뭐가 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껏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끌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 사회가 이끄는 방향대로 성실히 움직이고 있었구나. 세계 여행보다는 내 집 마련이, 전 세계 스타벅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세계를 떠도는 꿈, 오키나와에서 팥빙수를 파는 리어카 장수가 되어 지루하리만큼 평온한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은 어느새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아 그럴듯한 직함으로 인생의 나침반이 뒤바뀌어 있었다. 그 누구도 나를 이 사회에 등 떠밀지 않았는데, 나는 어느덧 타인의 시선과 나를 둘러싼 환경에 맞춰 몰려오는 파도에 올라타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던 거다.


스스로 삶이 멈춰있다고 생각한 건, 어른으로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당분간 그만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비생산적이고,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습게도 지금 이 시간을 내 인생에 일시정지를 누른 것처럼 멈춰 있다고 느꼈다는 건, 그동안 얼마나 '해야만 해는 일'에만 포커스를 두고 살았는지를 방증한다. 그러니까, 내 담당의가 던진 "지금 혹시 멈춰 있다고 생각하나요?"라는 단순한 질문에 이 길고 지난 답이 스쳐갔다는 거다.


"지금은 시속 100km로 달리던 삶의 속도를 잠시 30km로 낮춘 거예요.
언제까지 우리가 100km 달릴 순 없잖아요.
지금 멈췄다고 느끼는 건, 그동안 너무 빠른
속도로 살았다는 것 아닐까요?
상처가 난 곳에 계속 약을 발라서 빨리
나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새 살을 덮을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세요."



마음이 철렁 내려 앉았다.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요즘 나는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속도를 찾아보려 한다. 새 살이 충분히 자리를 잡고 다시 속력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를 기다려주기로 한다. 때때로(아니 수시로) 삶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동력 삼아 마음이 과속으로 달리려 할 때면, 몸의 신호등을 켠다. 몸의 신호에 맞춰 마음이 잠시 멈춤을 허락할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호흡에만 집중한다. 어쩌면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할 때를 알아차리는 것. 나는 오늘도 시속 30km의 삶으로 움직이며 나를 다독인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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