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사람, 안솔님 이야기
여행을 하며, 마음에 드는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의 삶을 보며, 대부분 사람들이 쉽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저도 작가님처럼, 직장 관두고 하고 싶은 일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그림을 업으로 삼기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않은 채로.
일러스트레이터, 안솔.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그녀도 처음엔 그림을 업으로 삼으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2014년 2월. 방송 보도과를 졸업했지만, 방송계로는 더 이상 나아가기 싫었고. 끄적이는 낙서에 눈이 밟혀, 그림의 세계에 천천히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조바심 내지 않았어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까지 풍경과 사람을 들여다보고, 수없이 꾸준하게 그렸답니다. 그리는 재미에 푹 빠지다 보니, 평생 그림으로 먹고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네요.
이제 일러스트레이터 안솔은 일러스트 다이어리북 <열두 달 제주>를 낸 어엿한 작가님입니다. 드로잉 클래스를 열어 사람들에게 그림을 알려주는 일도 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시리즈인 제주 일러스트 다이어리북 작업도 준비하고 계시대요. 매일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포근한 에너지를 안겨주는 사람, 안솔을 소개합니다.
제 전공은 그림과 아무 관련이 없는 방송 보도제작과예요. 대학을 진학할 때는 PD가 되고 싶은 마음에 방송 특성화 대학교에 무작정 들어갔어요. 그런데, 갈수록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방송계가 혹독한 환경이라는 것도 알았고요. 학교에서 과제를 내주면, 딱 그 과제만큼만 공부했어요. 그 이상의 노력은 들이기 싫었어요. 취업은 하긴 해야 하는데. 무작정 취업하기는 싫은 마음에 제가 뭘 좋아하는지 골똘히 생각해봤어요. 문득, 학창시절에 친구들이랑 낙서를 그리며 즐겁게 보낸 기억이 났죠. 별거 아니었지만, 기억에 오래 남아서 취미로 한번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어요. 그릴수록 재미가 날수록 커지니,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고요.
저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웃음) 오히려 선택을 반대로 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제 선택을 보며 큰일 난다고 불안해하기도 했어요. “전문대 가는 거 후회할 거야, 휴학해서 뭐 하게? 그 나이에 그림을 그린 다구?” 그런데 지금까지 한 단계씩 거쳐보니, 큰일 나지 않았어요. 우려와 다르게 무사했어요. 다들 주변 사람들처럼 당장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는데 지나보면 별다를게 없더라고요.
제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한지 탐색하는 시기가 필요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직장에 들어가 몇 년이 훌쩍 지나가고 일이 맞지 않아 후회하는 거라면, 결국 더 먼 길을 돌아가는 셈이니까. 그래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여기저기 다녔어요. 인큐부터 시작해서, 인문학 강연, 작가와의 만남을 쫓아다니면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했어요. 어떤 친구들은 제 모습을 보며 ‘넌 왜 취직은 안 하고 계속 여행만 해?’라고 묻기도 했어요. 시각이 달랐던 거죠. 삶에 대해 근시안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그림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는 말,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에요. 제가 정도 많고 가끔 어린애처럼 해맑은 면도 있는데 그런 부분이 그림에 담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그림을 그리기까지 오랜 창작이 이어졌어요. 처음 그림 그릴 때는 제 그림체라는 게 없어 들쑥날쑥했어요. 혼자 그림을 그리려니 막막하기도 하구요. 한계가 느껴질 때가 있어서 배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배우지 않았어요. 제 것이 아닌 그 사람 그림체를 흉내 내게 되지 않을까 싶은 우려에서요. 그래서 다양하게 실험해봤어요. 다른 작가님들 그림을 보며 흉내도 내보고, 보이는 사물을 제가 본 시선, 느낌대로 자유롭게 표현해보기도 하고. 색연필, 크레파스, 물감을 사용하며 어떤 재료가 저랑 맞을지 고민도 하고. 이렇게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 색깔이 보였어요. 그즈음, 사람들도 그림을 보며 그림이 따뜻하다고 말해주기 시작했고요.
그리고 취미로 그림을 시작했기에, 일을 병행하며 시간을 보냈는데요. 거기서, 기회를 많이 만났어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서 메뉴판을 그려서 만들어보기도 하고, 그린 엽서와 달력을 사람들에게 팔아보기도 했어요. 제 SNS를 보고 청첩장이나 삽화 문의가 들어와 그린 적도 있고요. 어느 날은 제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크라우드 펀딩으로 돈을 모아 카페에서 작은 전시를 해봤어요. 그런 작은 성취의 경험이 눈 내리듯 소복소복 쌓였어요. 이런 과정을 보며 제 그림을 좋아해 주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많아진 것 같아요. 덕분에 용기도 생겼고요.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은 귀한 시간이었어요. 처음 파리를 방문한 건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다녀왔을 때였어요. 영감을 주는 장면들이 많아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함께 하는 여행이라 그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제 방식, 제 속도대로 느끼고 싶어서 다시 다녀왔죠. 보이는 게 달랐어요. 잠시 머무르지 않고 그곳에서 오래 살아보니까요.
하루에 4-5시간 동안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그림도 그리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어요. 어떤 날은 에펠탑이 보이는 공원에 눌러 앉아 노을 지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낮잠도 자고 친구들과 센강 강가에 앉아 맥주도 마시고 동네 단골 가게도 만들었어요. 현지인들이 사는 것처럼요. 시간에 쫓기지 않았어요. 미술관에서 좋아하는 그림 앞에 앉아 작품을 한없이 보며 모작해보고. 거리 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려주고 대화도 나누고. 그런 여행 중에 저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어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끊임없이 메모하고 글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저는 보고 느낀 걸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림으로 마음이 통했던 순간들이 많죠. 어느 날, 공원에서 책 읽는 할머니 모습이 좋아 그려 그림을 건네드렸어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그 행복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할머니께서 그림을 소중히 감싸서 가지고 가시는데, 기분이 좋으신지 연신 웃으며 가시더라고요. 어느 날은 혼자 광장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데 어떤 영국 친구가 와서 그 모습이 멋지다며 사진을 찍어줬어요. 알고 보니 꽤나 유명한 포토그래퍼였어요. 고마움의 표시로 저는 그 친구 얼굴을 그려줬고요.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재미난 일들이 많아요. 에펠탑 앞에서 그림엽서를 팔 때는 에펠탑 열쇠고리를 파는 흑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없었겠죠.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며, 불안감도 줄어들었어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생을 살고 있었어요. 저는 조금 평범하지 않은 길을 선택한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제 방식, 제 색깔대로 살면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때 들었어요. ‘그림으로 평생 일하고 싶다’는 생각.
네. 신기하게도,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에요! 출판사에서 파리에서 이야기와 그림을 엮어 책을 만들자는 제의였어요. 이렇게 기회가 빨리 찾아오니 너무 좋았죠!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아 성사될 뻔한 계약이 모두 물거품이 됐어요. 그래도 감사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기회를 마주했어요. 쉬러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는데, 운영하고 있는 분이 출판사 사장님이었죠. 그 연이 닿아 제주를 소재로 책 작업을 계약했어요. 기획부터 제작까지 세 달 만에 책을 작업했어요.
제 살과 뼈를 온전히 갈아 만든 책이에요.(웃음) 마감 기한이 빠듯해서, 편집장님 가까이에 붙어 책 작업에 몰두했어요. 덕분에 제주로 거처를 잠시 옮겼죠. 고요한 동네, 제주 종달리에 살며 자연도 누리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일러스트 다이어리북 <열두 달 제주> 책을 완성했어요. 제목처럼, 제주의 사계절을 담는 그림을 그렸어요. 메밀꽃이 만개하고, 억새들이 오름을 뒤덮고, 귤을 수확하고, 동백이 피어나는 모습들. 매달 그 순간들이 기다려졌어요. 세련되고 예쁜 카페나 상점들도 좋지만, 자연이 주는 행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어요. 제주에서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도 넓은 바다 앞에 앉아 파도소리 듣고 탁 트인 오름에 올라가서 숨 몇 번 고르다 보면 마음의 응어리가 금세 풀어지는 듯해요. 자연이 워낙 아름다우니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고 싶은 소재가 넘쳐난다는 점도 제주의 큰 매력이고요.
마냥 낭만적인 모습만 있는 건 아니에요. 종달리는 동쪽 끝자락 시골마을에 있어요. 벌레도 많고 날씨 변덕도 심했어요. 바닷가 집이라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인적도 없어 무섭고 힘들 때도 많았어요. 이런 불편함은 모르실 거예요.(웃음) 그래도 고생 끝에 작업한 마음을 다들 아시는지 일주일 만에 2쇄를 찍었어요. 제주 책방에서 전시도 열었고요. 많은 분들이 전시를 보기 위해 멀리서 종달리까지 찾아오셨어요. 너무 감사하죠.
그저 가볍게 들리진 않아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으니까요. 예전에는 그림을 재미로만 그렸다면 이제는 제가 먹고사는 수단이 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신경 쓸게 많아요. 그림만 그리지 않아요. 다른 부수적인 작업들이 더 많죠. 그림을 알리기 위해 여러 SNS를 관리하고, 포스팅하는 일, 엽서나 스티커 같은 굿즈를 제작하고 발송을 준비하는 일, 클래스 오픈, 자기계발까지. A to Z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삶이에요. 자율성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다른 사람에 비해 크고요. 다른 직장인과는 너무 다른 일상이에요. 그래도 평소에 일을 벌이는 성격이라 힘들지만 재밌게 해나가고 있어요. 오히려, 주어진 일을 해야 했다면 몸을 배배 꼬았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 야자 했을 때처럼. (웃음)
이제는 제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고 좋아해 주세요. SNS 상에서 눈여겨봤던 사람들이 같이 작업을 하자며, 좋은 제안을 해주시기도 하고요. 그럴 때마다 매번 신기하고 감사해요.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서 보면, 저는 비주류에요. 전문대 졸업에 비정규직이고, 프리랜서까지.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이게 틀린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게 맞는 옷을 찾은 느낌이에요. 불안정한 삶에 대한 두려움보다 평생 나를 모르고 어정쩡하게 사는 게 더 두려웠거든요.
저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하나 뽑자면, ‘자유’에요. 어딘가에 얽매여 있거나 매일 똑같이 짜인 틀대로 굴러가는 생활을 워낙 못 견뎌요.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모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지 알면 돼요. 어떤 사람은 안정적으로 사는 삶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껴요. 저는 흥미와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은 하려 하지 않아요. 각자가 가진 성향과 가치관이 다른 만큼, 스스로 깊이 살피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면 좋겠어요. 그게 그 사람만의 답이라고 생각해요.
01. 어찌 됐든 그림을 꾸준히 그려보기
인큐에서도 강조하는 게 있어요. ‘꾸준함도 실력이다.’ 누구든 피나게 연구하고 노력해서 만든 시간은 무시할 수 없어요. 처음부터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더라구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오랜 시간, 꾸준히 바라는 것에 투자해야 해요.
02. 스스로 관찰하고 자유롭게 표현해보기
처음부터 원근감, 명암 등 이론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돼요. 틀에 박힌 그림, 기술적인 그림보다 내 색깔이 느껴지는 그림을 원한다면 관찰하고 표현해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그런 그림이 더 매력적이랍니다. 혼자 하기 막막하다면 유튜브, 취미 미술 책도 많으니 찾아보길 권해요.
03. 두려움 버리고 SNS에 포스팅하기
그림을 통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싶다면 작품을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게 중요해요. 처음부터 완벽한 그림은 아니더라도 내 색깔이 담긴 그림을 보여주고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됩니다. 그런 과정이 쌓이다 보면, 응원해주는 팬이 생기기도 하고 크고 작은 기회를 만나기도 해요. 저 또한 모자란 실력이 부끄러워 그림을 묻어뒀다면 업으로 삼을 수조차 없을 거예요.
인터뷰 후기
인터뷰를 하며, ‘천천히 오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작은 점을 연결해 가며 그녀만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참 매력적이었다. 덕분에 올해 하반기, 나의 키워드도 ‘천천히 오래’라는 단어가 깊숙하게 자리 잡을 듯하다.
[출처] 여행하는 그림작가 [안솔님 이야기]|작성자 인큐
18. 05. 31 by 에디터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