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K의 메디콤뉴스 기고 글
호주의 크래프트 증류소(Craft Distillery)
2025년 5월에 방문한 호주 퀸즐랜드 골드코스트의 Granddad Jack’s(그랜드대드 잭스) 증류소 내부 : 단식 증류기와 연속식 증류기가 나란히 서 있다. 작은 크래프트 증류소의 창고형 공간에 햇빛이 쏟아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골드코스트에 있는 Granddad Jack’s Craft Distillery는 겉보기엔 바닷가 근처 조그마한 창고 같다. 이 증류소는 가족이 운영하는 크래프트 증류소로, 할아버지 “잭”의 삶과 이야기가 구석구석 배어 있다. 할아버지 데이비드 “잭” 굴딩의 96년 인생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아들과 손자가 2018년에 증류소를 열었다고 한다. 벽에는 할아버지 “잭”이 이발사로 일하던 시절의 사진과 오래된 경마장의 추억이 담긴 소품들이 걸려 있고, 모든 술의 이름과 레시피에는 그에 얽힌 일화가 깃들어 있다. 이곳에서는 가족의 전설을 한 방울의 술로 재현하며, 방문객은 자연스럽게 “잭” 할아버지의 손자손녀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호주 향기를 담은 재료들
잔을 들기도 전에 코끝에 스치는 향부터 남다르다. 유칼립투스, 고수, 호주의 허브와 향신료… 호주 자연을 담은 재료들이 증류소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유칼립투스 잎을 진에 넣는다는 설명 뒤에, 증류소 직원은 코알라가 먹는 나뭇잎 향, 아니 코알라 향(?)이 술에서 난다는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들의 바버숍 커피 리큐어(Barbershop Coffee Liqueur)에는 코코넛, 바닐라, 계피 등의 특이한 재료도 들어가 부드럽고 깔끔하면서도, 커피 특유의 뒷맛을 낸다. 호주산 보리를 비롯한 곡물도 현지에서 조달하여 위스키의 몰트 원료로 사용하고, 딸기나 수박 같은 과일을, 진 증류 후 인퓨징하여 계절 한정 진 제품을 내놓기도 한다. 어느 한 잔에도 호주의 토양과 햇살이 스며있어, 스코틀랜드와는 또다른 정취를 음미하는 즐거움이 특별하다.
증류기와 작은 오크통, 손끝에서 빚는 증류
투어를 시작하며 마주한 증류 설비의 규모는 아담하지만 할 일은 다 한다. 단식 증류기가 한쪽에 있고, 옆으로는 여러 개의 연속식 증류기가 늘어서 있다. 위스키를 만들 때 맥주와 비슷한 워시(wash)를 먼저 단식 증류기에서 1차 증류한 후, 2차 증류부터는 연속식 증류기로 올려 도수를 뽑아낸다고 한다. 증류소 직원의 말에 따르면 연속식 증류기를 놓기 위에 지붕을 뚫었다고 하며, 연속식 증류기의 부품을 보여주며 그 작동원리를 꽤나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하였다. 이는 일반적인 스코틀랜드식 증류와 달리, 작은 증류소라 가능한 하이브리드 방식이며, 전통과 효율의 균형을 잡은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다.
이 증류소의 철학은 대량생산이 아닌 수제 소량생산이다. 증류 후 숙성에도 독특한 방식이 동원되는데, 창고 한켠에 쌓인 작은 오크 배럴들(10~100리터 크기)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반 위스키 증류소의 커다란 200리터 배럴과 달리, 이곳은 소형 오크통을 활용하여 술과 나무의 접촉 면적을 극대화한다. 덕분에 술은 더 빠르게 색과 풍미를 얻지만, 그만큼 엔젤스 쉐어도 극심하다. 증류소 직원의 말에 따르면, 골드코스트의 무더운 기후에서는 단 3년 만에 원액의 70% 가까이가 증발할 정도라고 한다. 작은 오크통들이 이뤄낸 농축된 향을 생각하고 테이스팅을 해보았다. 실제로 현장에서 맛본 배럴 샘플들은 짙은 색과 풍부한 향을 가진 젊은 위스키였다. 프렌치 오크와 호주산 레드와인 캐스크로 숙성했다는데, 최종적으로는 골드코스트의 기후가 빚어낸 선물이라고 증류소 직원은 말하였다.
크래프트라서 가능한 다양한 증류주들
Granddad Jack’s의 시음 테이블에는 각양각색의 병들이 줄지어 있다. 마치 할아버지 “잭”의 인생 이야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으로, 각 제품의 이름과 맛을 음미해 본다. 이들의 시그니처 라인업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투 펜슬스 진(Two Pencils Gin): 할아버지 “잭”이 어릴 적 연필 두 자루를 한 펜스로 팔던 일화에서 이름을 딴 진이다. 주니퍼베리 하나로 승부 보는 클래식 드라이 진으로, 균형 잡힌 맛 속에 ‘솔의 눈’처럼 상쾌한 솔 내음이 가득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마치 전통 런던드라이 진을 연상시키지만, 그 담백함이 오히려 칵테일 베이스로서 매력을 발휘한다.
• 65 마일즈 진(65 Miles Gin): “잭” 할아버지가 과거에 자전거로 왕복 65마일을 오가며 출근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수 57%의 스트렝스 진으로, 계피, 정향, 카다멈 등의 베이킹 스파이스 향신료가 주니퍼보다도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넘어가는 편이어서 온더록으로 즐기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바텐더라면 이 진으로 네그로니와 같은 칵테일을 만들어보고 싶어질 것이다.
• 바버숍 커피 리큐어(Barbershop Coffee Liqueur): 48년간 이발소를 운영했던 잭 할아버지의 커피 사랑을 기려 만든 리큐르다. 실제로 전 세계 대회에서 “세계 최고의 커피 리큐르”로 선정될 만큼 품질을 인정받은 술이기도 하다. 호주 골드코스트 지역의 사회 로스터리에서 공수한 신선한 원두로 추출한 커피(콜드브루)를 베이스로, 바닐라와 코코넛의 달콤함, 약간의 유칼립투스 허브 감각이 더해져 있다. 처음엔 진한 콜드브루 커피처럼 씁쓸하고 묵직한 풍미가 느껴지지만, 곧이어 찾아오는 부드러운 단맛과 스파이시한 여운이 일품이다. 단숨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일반 단맛 리큐르와 달리, 혀 끝에 남는 살짝 쌉싸름한 커피의 여운이 느껴진다.
이 외에도 핑크빛 병이 사랑스러운 핑크 진(Pink Pink Gin), 페니 보드카(Penny Vodka) 등 개성적인 제품이 즐비하다.
증류소 테이스팅 룸의 편안한 소파 위에 진열된 Granddad Jack’s의 보드카, 진 그리고 커피 리큐르. 현장에서 현지 치즈와 크래커를 곁들여 다양한 시음을 즐길 수 있다.
증류소 투어를 마치고 테이스팅 룸 좌석에 앉아 마지막으로 한 잔을 음미하던 중, 재미있는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Granddad Jack’s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한때 미국의 테네시 위스키 거인 잭 다니엘스(Jack Daniel’s) 측에서 상표 분쟁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잭”이라는 단어가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소송을 벌이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하며, 결국 Granddad Jack’s는 본래 이름과 스토리를 그대로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오히려 이 해프닝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고 한다.
Granddad Jack’s Distillery는 『한 방울의 탐험』에서 소개한 스코틀랜드, 일본, 대만의 대형 증류소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대형 증류소들은 자동화 설비, 정교한 품질 관리 시스템, 다단계 공정을 기반으로 수십만 리터 단위의 생산량을 감당하는 데 반해, Granddad Jack’s는 작은 단식 증류기와 연속식 소형 증류기를 병용하며 수백 리터 단위의 소규모 배치를 운영한다. 숙성 방식에서도 대형 증류소가 200리터 이상의 통일된 배럴과 거대한 숙성고를 사용하는 데 비해, 이곳은 10~100리터의 다양한 크기의 오크통을 활용해 골드코스트의 열대성 자연 기후 속에서 빠른 숙성을 유도하며, 높은 엔젤스 쉐어를 감수한다.
이처럼 Granddad Jack’s는 소규모 증류소만의 유연성과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대형 증류소에서 느낄 수 없는 개성을 보여준다. 대규모 생산 대신 정체성과 창의성을 우선한 그들의 방식은, 마치 ‘증류소가 아니라 한 병 한 병의 작가’처럼 다가왔다. 한국에는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은 꽤 많지만, 아직 이러한 크래프트 위스키 및 진 증류소는 거의 없는것이 현실이다. 한국에도 이러한 실험적인 증류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