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an of Whisky

홍콩의 한 잔과 한 병 - 매그놀리아랩과 N.I.P

에디터 K의 메디콤뉴스 기고 글

by 에디터 K

Magnolia Lab의 아마로, 그리고 N.I.P Distilling의 진



홍콩에서 다시 만난 Dennis Mak과 Magnolia Lab


9월 중, 나는 홍콩에서 Magnolia Lab의 Dennis Mak을 다시 만났다. 서울 바 앤 스피릿쇼에서 처음 인터뷰로 인연을 맺었던 그와, 이번에는 홍콩에서 다시 마주했다. 그는 최근 한국 GQ 매거진에도 소개된 바 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잡지를 직접 건네며 그의 실험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를 얻었다.


Dennis는 여전히 동서양을 잇는 아마로에 몰두해 있었다. 바 카운터 뒤에는 이탈리아 아마로, 프랑스 리큐르, 그리고 Magnolia Lab이 직접 만든 한약재 아마로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는 이들을 섞어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쓴맛과 단맛, 허브와 향신료, 그리고 한약재 특유의 깊은 뉘앙스가 잔 안에서 서로 교차하며 독특한 풍경을 그려냈다.


그는 또, 홍콩의 로컬 전통 차인 廿四老味茶와 같은 약재차를 바탕으로 한 칵테일 레시피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기자·진피 같은 재료가 차이자 동시에 칵테일의 보태니컬로 살아나는 순간, 동아시아적 감각과 현대 믹솔로지의 언어가 만나고 있었다.



도심의 증류소 – N.I.P Distilling


다음 날 나는 홍콩섬 Quarry Bay의 Westlands Centre 6층에 위치한 N.I.P Distilling을 찾았다. 고풍스러운 양조장이 아닌, 산업용 빌딩 한 칸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외형은 소박했지만 내부는 빼곡한 배관과 구리빛 장치로 가득 차 있었다.


유리벽 너머에서 마주한 구리 증류기 ‘April’은 독일 Christian Carl 제작의 220L 포트–컬럼 하이브리드였다. 첫 증류는 포트(pot)에서, 두 번째 증류는 컬럼(column)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곳의 컬럼은 길이가 짧아 호주의 진 증류소에서 보던 장대한 칼럼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오히려 이 컴팩트한 구조 덕분에 도심 속에서도 다양한 보태니컬 향을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었다.


증류소 투어를 하며 만난 N.I.P의 공동창업자 Nicholas Law는 흥미로운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멜버른대학과 홍콩시립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국제 로펌과 투자회사를 거쳐 법조·금융권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중 증류 세계에 매료되어 2017년 증류소를 설립했고, 2020년에는 IBD General Certificate in Distilling을 취득해 전문성을 갖추었다. 법학과 금융에서 시작해 증류의 길로 들어선 그의 여정은, 브랜드명 N.I.P (Not Important Person)의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N.I.P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VIP(Very Important Person)의 반대 개념에서 출발한 이 이름은 “특별한 배경이나 인맥이 없어도 묵묵히 걸어가면 결국 의미 있는 성취에 닿을 수 있다”는 신념을 담고 있다. 치열한 경쟁과 빠른 리듬 속에서 종종 ‘왜 일하는가’를 잊고 살아가는 홍콩인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메시지다. 다시 말해, N.I.P는 화려함을 좇기보다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에 용기를 내어 다가가라는 제안이었다.


이 철학은 술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홍콩이라는 도시는 동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뒤섞이며, 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조화를 이룬다. N.I.P는 바로 그 다채로운 템포를 보태니컬의 언어로 번역한다. 찻잎, 오스만투스, 광둥 요리에 흔히 쓰이는 진피 같은 로컬 재료는 진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연으로 기능한다. “홍콩의 맛”을 병 안에 담아내려는 이 시도는, 결국 도시의 리듬과 정체성을 술을 통해 다시 말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왜 출입이 제한되는가 — 홍콩의 주류 규제


홍콩에서 증류소를 방문하면, 대부분 유리벽 너머에서만 내부를 볼 수 있다. 이는 홍콩의 법령 체계에 따른 결과다. 홍콩은 관세법(Dutiable Commodities Ordinance, Cap.109)과 시행규정(Cap.109A)에 따라, 알코올 음료의 제조·보관 공간을 엄격히 면허 관리한다. 주류가 생산되는 구역은 곧 미납세(untaxed) 알코올이 존재하는 구역이므로,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구획·통제·기록 관리가 필수적이다. 원액 반출·반입, 라벨링, 보세창고 관리까지 세세한 규정이 덧붙는다.이 때문에 홍콩의 증류소는 관람–브리핑–시음 구조로 투어를 진행한다. 즉, 방문자는 유리벽 밖에서 생산 공정을 보고, 별도의 공간에서 설명을 듣고, 완제품만 시음할 수 있다.


참고로 영국의 증류소는 방문객 센터와 생산동선을 분리해 출입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고, 한국의 체험형 양조장은 일정 조건 하에 내부 투어·체험을 허용한다. 이에 비해 홍콩은 규제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엄격하다.



N.I.P 진, 그리고 병에 새겨진 붓글씨 - 영화의 기억


N.I.P의 세 가지 대표 라인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서울 바 앤 스피릿쇼에서도 접해본 라인업이다.


- Rare Dry Gin : 진피·오스만투스·구기자·홍차

- Exotic City Gin : 퍼퓸 레몬·운남 홍차·카다멈

- CATNIP Tea Gin : 봉황단총·대홍포


이날 나는 특별히 마데이라 캐스크 숙성 진을 맛볼 수 있었다. 오크 숙성을 거치며 드러난 은은한 산미와 말린 과실의 깊이는 기존 라인업과는 또 다른 차원을 보여주었다. 노란 빛깔의 진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시음 후 한 병을 직접 구입했다.


N.I.P의 병 라벨과 바닥 그리고 N.I.P 증류소 바에는 홍콩 영화 포스터의 전설적 서예가 화거(Wah Gor)의 휘호가 담겨 있다. 홍콩 영화 전성기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스크린 밖에서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글씨다. 홍콩 대중문화의 시각적 유산을 병에 새겨 넣은 셈이다. 병 하단에 새겨진 글자는 ‘승리(勝利)’를 뜻하며, 한국의 ‘건배’와 같이 홍콩 사람들에게 익숙한 외침 “Yam Sing!(乾杯)”과 맞닿아 있다.


병을 열면 퍼져 나오는 향과 입 안에 맴도는 맛, 그리고 라벨의 붓글씨가 겹쳐지며, 한 병의 진이 곧 홍콩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미디어로 작동하고 있었다.



홍콩 로컬 바에서 드러난 보태니컬 감각


홍콩은 증류소만이 아니라 칵테일 바에서도 로컬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나는 홍콩 곳곳의 유명 바를 직접 찾아가며, 한국과는 또 다른 감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Asia’s 50 Best Bars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명소들은 도시의 문화 실험실에 가까웠다.


•Penicillin Bar :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키워드로 내세운 곳이다. 칵테일 잔에 담긴 재료 대부분이 지역 농산물·발효 소재에서 나왔고,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시도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Tell Camellia : 이름 그대로 Camellia(차)를 전면에 내세운 바. 스리랑카·일본·중국·대만 등 세계 각지의 차를 테마로 한 칵테일을 제공한다. 한 잔을 마실 때마다 다른 나라의 풍경과 향기를 여행하는 듯한 경험이었다.


•The Old Man : 문학적 영감을 기반으로 한 실험적 바. 헤밍웨이 소설을 칵테일로 번역한 메뉴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전혀 새로운 질감과 향을 만들어냈다. 한때 Asia’s 50 Best Bars에서 1위를 차지한 이유가 이해됐다.


•Bar Leone : 클래식 칵테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이탈리아 전통의 바 문화와 홍콩적 세련미를 절묘하게 접목시킨다.


이들 공간은 공통적으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으로 한약재·티·허브를 칵테일에 과감히 접목하고 있었다. 나는 이 바들을 돌며 “홍콩의 칵테일은 로컬의 뿌리를 창조적으로 번역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홍콩은 술로 자신을 다시 말한다


Magnolia Lab의 아마로 칵테일은 한 잔 속에 홍콩의 이야기를 전했고, N.I.P Distilling의 마데이라 캐스크 진은 한 병 속에 도시의 실험정신을 담아냈다. 여기에 더해, 홍콩의 칵테일 바들은 로컬 한약재와 차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세우며, 술을 통해 도시의 기억을 다시 말하는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N.I.P Distilling 홈페이지 : https://www.nipdistill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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