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an of Whisky

경주 바 분(芬)의 겨울 : 고수레·두두리·어둑서니

에디터 K의 메디콤뉴스 기고 글

by 에디터 K

『한 방울의 탐험』 공동저자 임오선 바텐더가 동의보감의 처방을 재해석한 세 잔의 칵테일



경주 황리단길의 바 ‘분(芬)’에 겨울이 오면, 이곳의 술은 유난히 조용해진다. 화려한 가니시나 과장된 향 대신, 잔 안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것은 곡물의 고소함, 과실의 산미, 향신료의 온기 같은 것들이다. 이 바의 바텐더 임오선은 필자와 함께 『한 방울의 탐험』을 쓴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책의 마지막 장, ‘개인연구’에서 동의보감과 옛 처방을 술로 옮겨보는 실험을 함께 기록했다. 그리고 이번 겨울 시즌, 임오선 바텐더는 그 실험들을 실제 메뉴로 완성해 바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번 시즌의 세 잔 — 고수레, 두두리, 어둑서니 — 는 한의학의 지혜를 빌린 칵테일이다. 이는 『한 방울의 탐험』의 개인연구 파트에서 시도했던 질문, “동양 의서의 처방 구조를 술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라는 탐구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Bar 분(芬) 임오선 바텐더 인터뷰


Q1. 이번 시즌 ‘분’의 한약재 칵테일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들어가기에 앞서, ‘분’은 한약을 짓는 마음보다는, 한약의 지혜를 빌리는 마음으로 칵테일을 만드는 곳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한국적인 재료와 향신료를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한약의 영역과 맞닿아 있는 재료들을 만날 뿐입니다. 현대 한국에서 한약은 엄연한 의료의 영역이니까요. 비의료인인 우리는 향신료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한약의 예를 빌려올 뿐, 약을 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약재라는 말은 너무 넓고도 무거우니, 분의 음료와는 조금 거리를 두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는 과거의 상비약이나 음식 등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바 있어, 그중 동양 의서의 처방을 칵테일로 재해석한 ‘고수레’를 소개하겠습니다.

동의보감 속 오두탕(五豆湯)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칵테일입니다. 콩이 가진 압도적인 고소함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해, 버번 위스키와 바나나를 조력자로 배치했습니다. 본래 오두탕의 주재료였던 칡은 그 맛을 받쳐주는 역할로 한 발 물러나게 했고요. 칵테일의 결에 맞지 않는 관중(고사리과 식물의 뿌리)은 과감히 제외했습니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균형을 찾은 한 잔이니, 분에 오신다면 편하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Q2. 동의보감이나 의서를 참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칵테일을 구상할 때 동의보감이나 의방유취 같은 의서를 즐겨 펼쳐봅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규합총서나 시의전서 같은 옛 요리책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지혜를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의서 쪽에 향신료로서의 재료들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어, 개성 있는 음료를 만드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되었을 뿐입니다. 거창한 계기라기보다는, 그저 ‘우리 것’을 담아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길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가장 깊이 있는 기록들에 닿게 되었습니다.


Q3. 한약이나 처방을 바텐더의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분은 한약 자체를 다루기보다 그 재료가 가진 향과 맛을 빌려 쓰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의학적 관점보다는, 훌륭한 향신료를 대하는 바텐더의 시각으로 바라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Q4. 특히 애착이 가는 재료가 있다면요?


약재라는 무거운 이름보다는 제가 아끼는 재료로 답하겠습니다. 저는 모과를 참 좋아합니다. 특히 그 그윽한 향을 사랑하지요. 모과를 쓸 때는 청을 담가 맛의 중심을 잡기도 하고, 말린 모과를 활용해 그 향기를 온전히 살려보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Q5.『한 방울의 탐험』의 개인연구 이후에도 실험을 이어가고 있나요?


사실, 책에 실린 연구들이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부끄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채 글로 남긴 것이 마음에 걸려, 출판 이후에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첫 답변이었던 ‘고수레’가 바로 책 속 오두탕 연구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이 답변으로 제 송구한 마음과 꾸준한 노력을 대신 전하고 싶습니다.


Q6. 마지막으로, 임오선 바텐더에게 한약과 동의보감이란?


약과 음식은 그 뿌리가 같다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의 말을 믿으며 의서를 참고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재료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으니, 비의료인인 저는 제게 허락된 곳에서 안전하고 맛있는 음료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 옳겠지요.

처음엔 맛있는 ‘한약’을 꿈꾸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칵테일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약과 동의보감은 분명 매력적인 도구입니다. ‘고수레’를 만들 때에도 오두탕은 분명 매력적인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약이고, 제가 만들고자 한 것은 음료입니다. 약재를 버리지 않고 주인공 자리에 칡을 그대로 뒀다면 칡과 고사리가 날뛰는 이상한 음료수겠지요. 도구에 홀린 것이 지나쳐 ‘맛있는 음료’라는 본질을 잃는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만 ‘우리 것’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개인연구에서 바의 잔으로


임오선 바텐더의 말처럼, 이번 시즌의 세 칵테일은 『한 방울의 탐험』의 개인연구 파트를 현실의 바 언어로 옮긴 결과물이다.


고수레는 동의보감의 오두탕(五豆湯) — 다섯 가지 콩과 칡으로 술 마신 뒤의 갈증을 풀던 처방 — 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고수레라는 이름이 원래 산과 들에서 자연에 음식을 나누는 제의였듯, 이 잔 역시 술자리의 시작과 리셋을 상징한다. 콩의 고소함, 버번의 온기, 약간의 바나나의 느낌이 겹쳐져 겨울의 속을 편안하게 채운다. 아이스로도, 핫으로도 제공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잔이 ‘술 그 자체’라기보다 술과 몸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지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두리는 『한 방울의 탐험』에서 실험했던 오매모과탕의 연장선이다. 오매(烏梅, 불에 그을린 매실)와 모과의 조합은 원래 술로 인한 갈증과 불편함을 다스리는 처방이었지만, 여기서는 위스키와 만나 호불호가 적을 새콤달콤한 칵테일이 된다. 이름 ‘두두리’는 신라와 고려 시절 경주를 지키던 목신(木神)에서 따왔다. 경주라는 장소성, 그리고 이 바의 술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의미가 이 잔에 겹쳐진다.



어둑서니는 동의보감의 여름 음료 제호탕(醍醐湯)을 겨울의 밤으로 옮긴 해석이다. 오매, 사인, 초과, 백단향, 꿀로 만들어지던 제호탕의 구조는 다크 럼, 블랙 카다멈(Black Cardamom, 草果), 아모뭄(Amomum, 砂仁), 샌달우드(Sandalwood, 白檀香), 진저에일로 번역된다. ‘어둑서니’가 밤의 헛것, 감각이 흔들리는 경계를 뜻하듯, 이 잔은 긴 겨울밤에 흐릿해진 감각을 향신료의 온기로 다시 깨운다.



겨울에 더 잘 어울리는 이유


흥미로운 점은 이 세 방제의 원형이 모두 여름의 갈증과 번열을 다스리던 음료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임오선 바텐더는 그것들을 겨울의 언어로 다시 썼다.


콩과 우유가 만들어내는 고소한 밀도는 몸의 빈자리를 채우고, 매실과 모과의 맑은 산미는 묵직해진 식탁의 흐름을 가볍게 끊어준다. 여기에 겹쳐진 향신료의 온기는 길어진 밤의 감각을 천천히 깨운다. 2025년의 끝과 2026년의 시작, 그 사이의 겨울에 이 세 잔이 놓인 이유다.


Bar Boon(芬)의 이번 시즌 세 잔의 칵테일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전통의 방제를, 한약이 아니라 칵테일이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임오선 바텐더와 함께한 『한 방울의 탐험』의 실험이 이제는 바의 잔 위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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