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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쿡 Jun 23. 2024

S대를 나오고도 알코올 중독자로 사는 이유 (1)

프롤로그 1 - 집성촌으로의 낙향과 대학 실패까지

나는 'S대' 출신이다. 아니, 정확히는 S대 '석사' 출신이다.


첫 문장을 보고서 이렇게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학벌 세탁 했네.
학사도 아니면서 무슨.


하지만, 이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 치고 내로라하는 학벌을 가진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살면서 S대 구경도 못 해 본 자들이 대부분임을 나는 안다.


아, 물론 S대 학사 출신이 저런 말을 한다면 나는 100% 인정할 자신이 있다.



잠깐 다른 길로 샜는데,


중요한 건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서 석사까지 마친 나는 지금 현재 공황 장애를 앓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매일 저녁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 괴로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공황 장애는 흔하디 흔한 질병이 되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공황 장애를 겪는 여러 연예인들이 나와 공(?)밍아웃을 해주셨고, 이것이 매스컴을 통해 퍼지면서 이제 공황 장애는 대수롭지 않은 심리적 아픔 정도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알코올 중독은 어떠한가. 의사들은 말한다. 갈증이 날 때 가장 먼저 시원한 맥주 한 캔이 생각나면 알코올 중독이라고. 그러면 대한민국의 성인남녀 80% 이상은 알코올 중독이 아닐까?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음주가무의 나라이다. 음주로 시작해 가무를 거쳤다 다시 음주로 끝나는 지상 낙원의 나라가 아니던가. 이러한 사회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맥주 한 캔 못하면 이건 명백히 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공황 장애와 알코올 중독이 흔하고, 걸리기 쉬우며, 치료하기 쉬운 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저러한 인식이 퍼지면서 실제 공황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대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어보겠다. 면접 자리에서 면접자가 공황 장애가 있다고 하면 당신은 그를 채용할 것인가? 알코올 섭취가 잦으나, 일상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면 채용할 자신이 있는가?


나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을 채용할 자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이 사실을 숨기며 살아간다. 아픔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매일 수면제를 섭취하며, 술을 먹어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공황 장애가 있다고 하면 무릇 휴학이나 휴직을 했을 것 같고, 알코올 중독이라고 하면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당신의 주변에는 이를 숨긴 채 무던하게 살아가는 친한 직장 동료, 친구, 가족이 반드시 있다.


그들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SNS처럼 모두가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푸념은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석사라는 타이틀과 굴지의 대기업은 아니지만 좋은 연봉과 좋은 커리어를 가진 직장인이 왜 아픔을 겪게 되었는지 조용히, 담담하게 풀어낼 생각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그저 공감하고, 이해하며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작하기에 앞서, 주저리주저리가 많을 내 글을 읽을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먼저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결코 뛰어난 작가도 아니고 타고난 라이터도 아님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나와 주변의 높은 기대와 이상, 보여주기식 삶이 만드는 내면의 공허.



좋은 대학교를 나온 학생들을 알 것이며, 좋은 기업에 취직한 직장인들도 알 것이다. 아니, 좋은 대학과 직장을 안 다녀도 안다.


항상 우리에 대한 기대는 크고, 자신의 기대와 사회, 부모, 주변의 기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대에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대 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운데 자신에 대한 기대도 높은 편이다. 그래서 매일 상처받고, 자존감을 잃고, 좋은 대학과 일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내면은 공허할 것이다.


이번 화는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이다. 앞으로 길어질 챕터들에 대한 간략한 요약본 정도로 생각해 주셔서 무방하다. 내가 왜 지금과 같은 아픔을 가진 채 살게 되었는지, 앞으로도 남들과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는지 훑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집성촌으로의 낙향과 육상부 생활의 시작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4살이 되던 무렵,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할머니의 건강 문제로 같은 성씨만 모여 있는 '집성촌'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집성촌에서의 삶은 아름다웠다. 좋은 공기와 환경, 친절하신 동네 어르신, 웃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 무엇보다도 지금의 MZ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각종 도구들까지 (아궁이, 대나무 활, 비석치기 등).


초등학생이 된 나는 전교생이 43명에 불과한 분교에서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반의 학우는 총 7명이었나, 8명이었나.


3학년 무렵인 걸로 기억하는데, 체육 시간에 3명밖에 없던 여자 학우들과 달리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학우에게 큰 거리 차이로 대패를 당했다.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입었다. 내가 알기로 우리 아버지는 역도를 했고, 우리 어머니는 어렸을 적 발레를 했다. 근데 패배라니.


나는 그 길로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육상을 시켜 달라고 했다. 이후 다니던 초등학교의 폐교가 기정사실화 되면서 읍내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 첫날, 그 학교에 육상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육상부에 찾아갔고 뛰는 걸 보고 육상부를 시켜주겠다는 코치님의 말씀에 선배들을 따라 운동장 27바퀴를 끈질기게 따라 뛰었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이 무렵부터 나는 하루하루 트랙을 돌면서 1분 1초를 줄이기 위해 도전하였고 성공할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이 도전적인 마인드는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내 몸과 마음에 심한 생채기를 남겼다.



육상부 생활 청산과 명문고 진학, 그리고 대학 실패

육상부 시절 나는 꽤 유명했다. 지역 내에서는 단거리든 장거리든 이기는 사람이 없었고, 특히나 1,500m와 3000m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남들이 다 기피하는 종목을 보란 듯이 해낸 것이다.


하지만, 육상에 비전이 없음을 느낀 부모님은 운동을 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하셨고,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못한 나는 육상을 그만두고, 대회만 참가는 것으로 체육 선생님과 원만한(?) 타협*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대회를 안 나간다고 하였다가 수행평가 'D'를 준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육상부 생활을 하면서 기른 정신력과 끈기를 바탕으로 전설처럼 들려오던 얼음물에 발을 담그는 신공을 써가며 치열하게 공부했고, 중학교를 전교 4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에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 내 명문 고등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무리해서라도 가고 싶었다. 장손이었고, 잘한다 잘한다 소리를 항상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여동생은 항상 전교 1등이었기 때문에 나도 잘하고 싶었다. 아,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었던 개인적인 욕망도 있었다.


당연히 또래 친구들보다 기본기가 부족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공부를 잘했다. 전교 2등까지는 했는데, 그다음 해인 2학년부터 급속도로 성적이 들쑥날쑥 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공부에 끈기를 잃어갔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점심시간에 축구만 하는 그저 그런 학생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런 나를 아버지는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우리 학교는 기숙학교라 2주에 한 번 외박을 나갈 수 있었는데, 학교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만 가더라도 걸어서 40분이 걸렸다. 그리고 우리 집은 집성촌에 있어 아주 멀었고, 짐도 많아서 누군가가 태우러 와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처음 한 두 번 오시고는 타지로 유학 온 아들을 태우러 한 번도 오신 적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두 번 정도 학교에 태우러 오셨는데, 맨날 땀을 뻘뻘 흘리며 차에 타는 나를 보고 굉장히 언짢으셨고, 보기 싫으셨단다.


그 후 수순은 안 봐도 뻔하다. 공부를 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급기야 고3 때는 초등학교 수학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논술을 좀 잘했던 나는 수학 성적을 보지 않는 논술 전형을 택했지만, 수능을 완전히 말아먹고 원하던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스스로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오판,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던 노력, 그리고 그렇지 못한 현실과 부족했던 실천 의지가 어떻게 실패를 불러오는지 느꼈던 첫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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