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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쿡 Jun 27. 2024

S대를 나오고도 알코올 중독자로 사는 이유 (2)

프롤로그 2 - 공황 장애 진단과 낙향, 그리고 합격한 S대



장교 전역 후 족발 체인점 입사, 그리고 평생교육원

강원도 최전방에서 중대장으로 근무를 하다 GOP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전역을 해버린 나는 몸과 마음을 바로 잡겠다면서 취직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격투기를 시작했다.


6개월 만에 무리해서 대회를 나갔고 수련이 부족했던 나는 팔꿈치 내측 인대가 모두 끊어져 수술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한 번도 내 병실에 찾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허튼 기대와 망상으로 취직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또 다른 것에 집중하고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의 전철을 다시 밟고 있었다.


이후 친구의 추천으로 수원에 있던 공기업에서 청년 인턴을 하던 중 '3P 바인더'를 만났고, 회장님께 들이대면서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 모토는 'DID*'였다.


*DID는 송수용 대표가 쓴 책 이름으로 들이대라는 뜻이다.


면담 간에 회장님께서는 "일단 뭐든 시작해라.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직접 경험이 첫 번째고, 독서와 같은 간접 경험이 두 번째"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길로 여동생이 있던 서울로 이사를 갔다. 회장님과의 면담 후에 무엇이든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모부가 일하던 족발 체인점 본사의 직영점에서 매장 관리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이어지는 높은 업무 강도와 주말 근무, 진상 고객들의 클레임은 나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이 당시 나는 자기 계발에 빠져있었는데, 수많은 검사와 나를 돌아보는 일종의 회상을 통해서 스포츠 마케팅을 하겠다고 또 한 번 이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27살의 나이에 평생교육원에 입학*했다.


*생각은 항상 부모님을 위한다면서 행동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근데 또 너무 이상적인 목표를 잡는 악순환에 고리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왕복 4시간의 지하철 출퇴근과 반지하 생활로 망가져 버린 건강

평생교육원 스포츠마케팅 학과로 입학했지만, 내 나이는 이미 27살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나는 성급하게 알바 아닌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뇌과학 기반의 영어 학습법 회사.


너무 그럴듯했다. 성공할 것 같았다. 체인도 많이 내고, 그중 하나를 받아 운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유명한 '뇌xx'과 같은 개념의 영어 학습법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또 한 번 기대와 이상이 현실을 뚫고 올리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신림동 반지하에서 살고 있었는데, 학교는 강서구, 회사 본사는 문정동, 학원은 의정부였다. 거기에 축구 선수 출신 학생을 가르쳤는데, 그 학생은 안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우리 집을 중간에 두고 4시간을 동서남북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선 마치고 돌아와서 몸을 뉘우는 곳은 신림동 반지하.


내가 생각했던 전역 후의 삶은 빠르게 금융권을 취직해서 자리를 잡아 30살 이전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여자친구와 얼른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한 푼도 안 받고 살면서 매달 내 월급의 10%를 부모님께 드리는 참된 효자로 살아가고 싶었다.


현실은 이와는 정말로 정반대였다. 그때부터였다. 매일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며 잠들기 시작한 게.



공황 장애 진단과 낙향, 그리고 또다시 고개를 쳐든 야망

시궁창 같았던 현실 속에서 능력 있는 아들이 되고 싶다는 목표와 높디높은 이상만을 바라보며 서울에서 발버둥 치길 몇 년, 결국 공황 장애 진단을 받았다. 


영어 학습 강사, 평생 교육원, 카페 알바 등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고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 판단은 잘못되었고, 모든 것이 엇나가고 있었다.


또한, 당시 나는 평생교육원에서 만난 학과장님과 함께 S대를 가보자며 열의를 다지고 있었고, 집에도 대학원에 가겠다고 목표를 말해 둔 상태였다.


나도 원했고, 부모님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S대를 가면 뭔가 나아질 줄 알았고, 사회가 원하는 인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공황 장애라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나는 해결할 자신이 없었고, 부모님께 진단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집에서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한숨과 안타까운 표정의 모습이 단번에 머릿속에 가득 찼다.


며칠 후 고향인 집성촌으로 낙향했다. 많은 상경한 젊은이들이 서울 생활을 못 이기고 지방으로 다시 내려가듯이. 그날 또 핑곗거리를 만들어 술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걸까?


절대로.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고, 숨겨 왔던 야망과 포부는 또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삼촌, 친척들에게 내뱉었다. "저 S대 갈 거 같아요."


그다음 날부터 도시락을 싸들고 도서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말에는 또다시 술을 퍼먹었고, 월요일이면 아픈 몸을 이끌고 정신과에 가서 약을 타먹었다.


의사는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처음으로 이룬 꿈 'S대'

도서관에 출근한 나는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공부를 했고, 집에 돌아와 다시 저녁 12시까지 그날 공부했던 부분을 복습했다.


하지만 가고자 했던 전공에서 요구한 영어 점수를 계속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려 200점이 부족했다. 남은 기간은 두 달 남짓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진심으로 마인드셋을 하기 시작했다. 시험 시간은 이렇고, 몇 번부터 몇 번은 이렇게 풀고, 이런 문제가 나오면 이렇게 접근하고, 이 부분에서 이 부분은 몇 분까지 해결하고... 등 마인드 컨트롤로 유명한 미국의 수영 선수 '마이클 팰프스'에 빙의한 듯 살았다.


너무나 쪽팔렸기 때문이었다. 28살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 아파서 집에 온 것도 쪽팔렸고, 친척들한테 대학원을 가겠다고 내뱉은 것도 쪽팔렸다. 그런 나를 챙겨주고, 보살펴 주고 있는 부모님에게 가장 쪽팔렸다.


이런 것이 '배수의 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요구한 점수를 맞추어 합격했다.


가 아니라, 성적 제출 전까지 두 번 남은 시험 중 한 번을 신분증을 안 챙겨 가서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나는 그날 필름이 끊겼다.


이제 기회는 한 번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시험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마인드 컨트롤로 하루의 시작을 알렸고, 우연히도 모의고사에서 계속 좋은 점수가 나왔다. 그렇게 매일 12시간 이상을 공부했다.


이번에 떨어지면 고향에서 마늘 농사, 가지 농사, 쌀농사나 지어야 했다. 농군의 아들이었지만, 농사는 내 체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만큼 절실했다.


시험 당일, 시험장에 일찍 도착한 나는 도서관에서처럼 또다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온 우주를 끌어당긴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풀어나갔다.


약 2주 후 시험 결과가 나왔다. 200점이 부족했던 나는 200점을 초과한 점수로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부모님과 함께 쌀 가마니를 옮기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합격 발표날이 아니냐는 아버지의 성화에 S대 합격증을 뽑아서 세리머니를 하듯 던졌다.


"아, 합격했다고요."


그렇게 나는 공황 장애와 알코올 중독을 얻고서야 처음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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