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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쿡 Jun 30. 2024

S대를 나오고도 알코올 중독자로 사는 이유 (3)

프롤로그 3 - 첫 직장과 루틴이 되어버린 입원




S대 이후 첫 직장과 루틴이 되어버린 입원

S대에 진학한 후 내 어깨는 마치 에베레스트 마냥 솟아 올랐다. 과 점퍼와 과 조끼, 볼펜, 스티커 등 모든 옷과 문구 등을 S대로 도배했다.


어느 날 연구실 선배와 선배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던 도중 누나가 이런 말을 했다.


"S대라고 떠벌리고 다니고, 뭐 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들은 그게 없으면 자신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거 엄청 비참한 거야."


머리를 망치로 누가 뒤에서 쌔게 한 대 때리는 것 같았다.


내가 S대를 선택한 이유는 커리어를 전환하고, 한 번 더 성장하기 위해서라고 자위했었다. 근데, 돌이켜 보니 뭔가 큰 뜻이 있다기보다는 학벌, 주변의 기대, 보여주기식 목표 등이 이곳까지 이끈 것 같았다.


이걸 위해서 몸과 마음을 버려온 것인지 시쳇말로 현타가 세게 왔다.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와선 노트북에서 S대 마크를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S대가 들어간 물품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 사실, 버리지 못해서 농사일에 쓰라고 부모님께 보냈다.


시간이 지나 석사 과정을 수료하기 전 원래라면 스포츠 마케팅 업계로 진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졌다. 스포츠 산업은 오프라인 중심이었기에 많은 기업이 문을 닫거나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는 갈 곳을 잃었다.



나는 평생교육원에 입학했던 때를 생각하면서 또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선택한 길은 디지털 마케터. 오프라인 중심 산업의 위험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비 지원 디지털 마케팅 부트캠프에 들어간 나는 나이가 거의 제일 많다는 이유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시 내 몸을 갈아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지털의 '디'자도 모르면서 디지털 광고 업계 1위 대행사로 가겠다고 같은 동네에 살던 삼촌에게 포부를 밝혔다.


아, 물론 1위 대행사로 들어가긴 했다. 그리고 퍼포먼스 부문에서 광고 대상을 거머쥐면서 1년 6개월 만에 대리로 초고속 진급을 했고, 매년 15~20% 이상 연봉 인상도 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잃었다. 바로 건강.


늦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중요한 것은 건강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인정이었다. 그리고 얼른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 당시 본격적으로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기 시작한 나는 코르크보드를 구입해서 원하는 삶의 모습과 원하는 것들을 사진으로 찾아 출력 후 걸어 두었다.


당시에 바인더에 적었던 목표와 시진은 온통 다음과 같은 것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최우수 직원, 최연소 진급, 광고 대상, 클라이언트 KPI 초과 달성, 1년 내 2회 이상 대형 광고주 담당...


나를 위한 것들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직장에 치우쳐져 있었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당시에도, 지금도 마음속에 없다. 그게 왜 있어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긴 하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 좋았던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파서 입원을 하면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광고주가 삼계죽이나 전복죽을 사주셨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대견해했다. 아파서 입원해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것뿐인지 아는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일을 했다. 대직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여자친구와 제주도로 처음 여행을 가서도 오전에 호텔 컴퓨터에서 다음 달의 캠페인 플랜을 짜고 있었다.


몇 년 되지 않는 직장 생활 동안 입원을 세 번 이상 했다. 간수치는 8,000을 넘긴 적도 있다. 참고로 정상 간 수치는 40이다. 1년에 한 번은 꼭 입원을 했던 셈이다.


그렇게 나는 순탄하게(?) 직장에서 인정을 받았고, 회사의 주요 광고주인 보험사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는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몰랐다.



광고주 보험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보험을 들어야 할 판

보험사 광고주로 자리를 옮긴 나는 적응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상과 현실은 일치하지 않았다. 뷰티를 담당하다 보험으로 업종이 바뀐 터라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광고를 집행하는 데 있어서도 수많은 단서조항이 존재했고, 그것들을 달달 외워야만 했다. 만에 하나 소재에 단서조항이 없거나 틀릴 경우 과징금을 물 수도 있었다. 또, 광고 소재를 기획하는 것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광고주의 텐션, 우리 팀의 텐션 역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 보험사는 우리 회사와의 관계가 오래된 회사였기 때문에 담당하던 직원들 역시 몇 년 이상 된 직원들이 많았다. 당연히 지켜오던 업무 방식, 프로세스 등이 존재했고 그것에 반할 때마다 '기조대로' 하라고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건지, 대리로 갑자기 중간에 들어와서는 물을 흐린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물론 내가 일을 잘 못했던 것도 있다. 그전에 조금 잘했다고 자만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이언트를 케어하기 위해서 우리 팀과 1개 팀이 더 있었는데, 이 2개 팀에 있던 몇몇의 여성 분들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 항상 밥도 같이 먹고, 수다도 같이 떨고. 이 무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비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 무리엔 여성들밖에 없었다. 남자도 있었다면, 나는 똑같이 그 무리에 있었던 여성 분들과 남성분들의 사이가 좋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조를 맞추지도 못하고 일도 못하고 있었던 터라 그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우연찮게 회사에 학교 선배가 있었다. 그리고 선배의 팀에 앞서 말한 무리에 속해있다 팀을 옮긴 직원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 팀 팀장과 학교 선배가 직원 트레이드를 놓고 의논을 하게 되었고, 학교 선배가 그 직원에게 우리 팀으로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그 팀에 그 대리님 있지 않아요? 그 대리님 폐급이라던데요."



한 순간에 폐급이 되어버린 나는 더 이상 팀에 소속감을 붙일 수 없었다. 공황 장애는 점점 심해져만 갔고,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다. 아침이면 회사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10분마다 깨고 자고를 반복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애꿎은 정신과 의사 탓을 하며 병원을 바꿨다. 점심시간이면 회사를 뛰쳐나가 근처에 있던 아파트 놀이터에서 잠을 청했다. 그게 불가능할 때는 점심시간 내내 회사 주변 동네를 맴돌았다.


아침이면 회사에 출근해서 점심시간 전까지 구토를 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었고, 구토로 인해서 속은 쓰리고 망가졌다. 그리고 저녁이면 다시 술을 마셨다. 나를 자책하며 매일 울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무단결근을 하는 직원, 지각하는 직원, 일 못하는 직원으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했던 학교 선배가 회사를 그만두어서 더는 푸념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었다.


팀장님과의 면담, 쇼펜하우어의 구절을 읽으면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내가 퇴사를 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고 그들을 이기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매일 오전 7시에 회사에 출근했다. 경비 선생님과 함께 출근했고, 주말에 함께 점심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업무도 광고 세팅과 집행이라는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 기획, 제작 커뮤니케이션 등 그들이 못하는 것들을 담당하며 내 자리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또 6개월을 보냈다. 버티고 버티며 3년을 꽉꽉 채운 나는 연봉을 1,000만 원 이상 높여서 원하던 회사로 이직했다. 내가 원하는 회사의 조건은 높은 연봉을 주는 외국계 회사였고 영어를 사용하며 향후 내가 글로벌로 진출할 때 교두보가 될 수 있는 회사였다.



공황 장애와 알코올 중독은 현재 진행형

나는 이직 후에도 할 말은 하는 아니,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굳이 하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자기는 수다를 떨면서 밥을 먹고 싶은데 말 수가 많지 않은 나랑은 같이 밥 먹기가 불편하다고, 그냥 서로 편하게 따로 먹자고 하는 사람과.


공황 장애는 나았냐고? 아니. 회사 근처로 병원을 옮겼고 약은 오히려 늘었다. 직장 적응과 이사, 결혼 준비로 스트레스가 더 늘었기 때문이다.


술은 좀 줄였냐고? 그것도 아니다. 아직도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술을 마신다. 새로운 직장과 직무에 적응하느라 공황 장애만큼이나 술을 먹는 양은 더 늘었다.


하지만 이전과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도 있고, 업무상 부딪힐 때면 이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진행했다고 말하거나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물어본다.


이직 초기에는 아예 면담을 신청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고, 이래서 많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이런 부분에 있어서 무서워서 움츠러드는 측면이 있었다고 터놓기도 했다.



이제껏 나는 나 자신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갈아 넣었고, 스스로에게도 큰 기대를 품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잦은 오판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10년 이상을 방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는 원대한 목표를 지니고 산다. 그리고 살아왔던 방식대로 여전히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며 산다. 사람은 바뀌긴 하지만 쉽게 바뀌진 않는다.


이제는 안다. 그게 뭐 어때서?


인정 욕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욕망이다. 물론 그것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본인이 나와 같은 20대에서 30대인가? 물론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본인의 삶이 길고 긴 방황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공황 장애와 알코올 중독은 나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연재될 내 이야기를 조금은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


우리는 아마도 많은 부분에 있어 비슷할 것이며, 절대 나약하거나 방황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한 계단, 한 계단 딛고 올라서는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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