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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준 Jun 04. 2024

나는 죽어서도 남편의 변호인

묘비 문구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

남편은 나를 죽였지만 죽이지 않았어요!     

순간 불타오르는 감정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리고 어느 시대든. 죽어서까지 남편을 변호하게 된 한 고대 그리스 여성의 묘비 문구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    

  

아래의 내용을 내 비석이 증언합니다.
내 남편이 한 짓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너무나도 결혼하고 싶어 나를 죽였다고들 해요.
왜 남편 루피니우스가 헛되이 악명을 얻어야만 합니까?
미리 정해져 있던 운명의 신이 나를 데리고 간 것뿐입니다.
나 타렌툼의 파울라만이 제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리스인기원전 1세기타란토(남부 이탈리아타렌툼), 

사르디스(현재 튀르키예)의 디오도루스가 비문을 쓰다.     


파울라라는 그리스 여성의 비문이다. 아무리 봐도 협잡의 냄새가 난다. 

파울라는 죽어서까지 남편을 변호한다. 그런데 변호의 내용이 수상쩍다. 남편인 루피니우스가 파울라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지 안 돌지, 이미 죽은 파울라가 과연 어떻게 알까? 알지 못하는 내용을 도대체 어떻게 변호할까?

파울라의 변호가 거짓이라면, 묘비 문구를 새겨서 이득을 보게 될 루피니우스가 의심스럽다. 루피니우스는 두 건의 행동을 동시에 변호하고 있다. 하나는 다른 여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또 다른 하나는 아내 파울라의 살해.

증언을 거꾸로 뒤집어 본다면 최소한 루피니우스가 다른 여자와 불륜 관계였다고 보면 자연스럽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불륜은 드물지 않다. 그리스 신화는 이 부분에서 유명하니 이야기할 것도 못 된다. 트로이 전쟁 서사에 등장하는 그리스 동맹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을 기억할까 모르겠다. 여러 그리스 비극 작품에서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내의 불륜 상대인 아이기스투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영웅 아가멤논이 평범한 사람인 파울라로 바뀐 것뿐일까? 루피니우스가 바람도 피고 파울라를 죽이기까지 했을지 확언하기 어렵다. 불륜을 저질러 놓고 그런 일은 없었다고 죽은 아내의 묘비 문구로 변명하는 것도 뻔뻔하긴 하다. 그렇지만 아내를 살해하고서 아내의 묘비 문구로 변명하는 그런 뻔뻔한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스펙터클하다고 해도. 그 정도의 인간성은 최소한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불륜 여부와 살해 여부를 떠나 확실한 것, 그건 남편 루피니우스는 자신의 악평이 매우, 엄청나게 싫었다는 것이다. 아내의 묘비 전체를 자신의 변명거리로 채웠으니까. ‘아내의 죽음을 팝니다!(4화)’ 에피소드와 비교하면 정도가 심하다. 4화에서 등장했던 제인의 묘비는 묘비 제작자 토머스의 상품 샘플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제인의 묘비 문구는 제인의 죽음 자체를 농락하지는 않았던 반면, 파울라의 묘비는 파울라의 죽음 자체를 모욕하고 있는 것만 같아 불쾌하다.

고인의 무덤을 대표하는 고인의 묘비 문구 정도는, 고인을 위해서 써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럴 자신이 없다면 이름과 생몰년 정도의 기본 정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천 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서, 자신의 욕망으로 가득 찬 한 사람을 만난 것만 같아 불쾌하다. 루피니우스가 무죄이든, 불륜남이든, 살인범이든 간에. 죽어서 묘비에서까지 변호인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평소에 이런 사람들을 잘 걸러내야지 싶다. 예나 지금이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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