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움이 없는 공연 감상기
뮤지컬, 난설 : 感想
소재가 ‘시’여서 그런 걸까. 전체적인 무대 구성 자체가 시적이다. 짧다면 짧은 26년의 생애를 살다 간 사람, 허난설헌이 남긴 시들이 한데 엮여 하나의 새로운 ‘시’ 이자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문학적인 뮤지컬 한 편이 탄생한 느낌이 들고, 대사 한 줄 한 줄 음미하기 참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단편적인 삶 혹은 일대기만을 담았다면 식상한 공연으로 끝나버렸을, 허난설헌의 이야기를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잘 만들었다. 어쩌면 서사적이길 포기하면서 회화적으로 잘 표현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서사를 찾기보다는 장면 장면을 오롯이 느끼기를 추천한다.
허균과 이달을 통해 전해지는 허초희(호는 난설헌, 이름은 초희) 그녀의 이야기와 허초희로 분한 배우가 연기하며 뿜어내는 노래와 대사를 듣고 있노라면 쓸쓸하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행복한 감정이 같이 전해진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굉장히 쓰지만 오래 머금고 있으면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 같달까.
그녀의 일대기 혹은 연대기만을 보여주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을 텐데, 작품의 방향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바로 허난설헌 그녀가 남기고 간 ‘시’ 자체에 주목한 것. 그리고 그녀의 ‘시’를, 서로의 '시'를 알아주는 벗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허균이란 인물을 단독 주인공로 내세우지 않고 화자로 삼아 홍길동전 이야기를 비틀어 작품에 녹여내, 꽁꽁 묶여 있던 허초희를 새로운 인물로 탄생시켰다. 허초희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일은 참 고무적인 일이라고 본다. 그만큼 어려운 시도였으리라..
특히나 그녀의 시 중에 그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적절한 시들을 고루 섞어 작품에 잘 녹여낸 것 같다. 작품에서 그려진 것처럼 그녀가 쓴 시들에서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쩌면 갑갑했던 결혼 이후의 생활 안에서 자유로움을 갈망하며 썼을지도 모르지만. (7살 때 쓴 시(광한전백옥루상량문)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지만) 그녀가 한 50년만이라도 늦게 태어났더라면 좀 더 많은 작품이 우리에게 남아있게 되었을까. 아니면 그 짧은 인생이 그대로 끝이 아니라 이미 그때 그녀의 시적 세계가 완결된 것이고, 더불어 그때 인생이 비로소 완성되었던 걸까.
공연에서 허초희는 남장으로 변복하여 시회(詩會)를 돌아다닐 만큼 당돌함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을 가진 인물로, 연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의상만큼이나 인물 설정이 새롭다. 공연의 전반에는 밝은 의상으로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우며 (발랄 당당) 온통 시로 가득 찬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이었다가 공연 후반에는 결혼 후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상복에 가까운 검정 한복을 입고 등장해 가슴속에 묻어둔 한과 인물의 내적 갈등이 고조되었다가 초연 해지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녀의 전부였던 시를 훨훨 날아가도록 태워 없앤다. 실제로 죽기 전 동생 허균에게 본인이 쓴 시를 모두 없애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반영한 것이다.
허초희로 분한 정인지, 하현지 배우는 좋은 캐스팅이었다고 생각되었는데, 특히 정인지 배우가 연기하는 허초희는 더 애달프게 느껴지고 마지막 곡을 들으면 마음이 함께 미어지고 무너진다. 넘버들의 분위기가 사실상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함과 동시에 작품을 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한다. 허초희의 시를 입은 음률은 좋다는 말을 하기에 입이 아프다고 할 수 있겠다.
무대는 단출해 보이지만 허초희가 쓴 한시와 묵향이 담긴 영상이 채워지면서 무대가 풍부해진다. 무대에 ㄷ자로 길게 서있는 나무들에 조명이 입혀지면서 다양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갈회색 나무였다가 앙상한 나무로도 보였다가 때때로 눈이 쌓인 나뭇가지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얀 나무들은 쓸쓸하면서도 올곧은 초희의 심상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대 중간에 놓여있는 나무벤치는 이달, 허균, 초희 셋이 시를 옮겨 적는 책상도 되었다가 벼루와 붓을 담는 서랍도 되었다가 이달과 초희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평상이 되기도 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붓, 한지 등 소품은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이고 군더더기가 없다.
이토록 좋은 향을 풍기는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길 바라고, 오래도록 음미하고픈 작품이 되길 바란다. 또 그녀의 시와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오래도록 전해지길 바란다.
이 작품이 앞으로 길이길이 전통 한국 창작 뮤지컬의 좋은 시도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뮤지컬 <난설>은 오랜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의 부재의 가뭄에 단비가 아닌 단 눈이 되어 내렸다.
공연 정보:
뮤지컬 <난설>
2019.07.13 - 2019.08.25
콘텐츠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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