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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딧쓴 Dec 10. 2022

버추얼 휴먼이 펭귄이면 안될까?

버추얼 휴먼이 전달할 수 있는 경험과 전달할 수 없는 경험

버추얼 휴먼, 가상 인간, 디지털 휴먼, 메타 휴먼, 사이버 휴먼. 이름은 다양하지만,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인간인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신사의 무아인, 볼보의 호곤해일, 롯데칠성의 류이드, 신한라이프의 로지까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버추얼 휴먼은 사이버 가수 아담일 수도 있겠네요.


기업들은 왜 버추얼 휴먼을 모델로 쓰려고 할까요? 버추얼 휴먼을 브랜드 모델로 내세우면 인기 있는 실제 모델과 계약하는 것보다 비용이 저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늙지 않습니다.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모델은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음주운전 등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으니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줄 위험도 없겠네요. 스케줄 조절에 어려움을 겪거나, 갑질 논란이 생길 위험도 적습니다. 실제 사람의 얼굴 위에 덧씌운 형태라면, 사람은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이유들이라면 사실 버추얼 휴먼은 휴먼일 이유가 없습니다.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버추얼 펭귄도, 버추얼 코끼리도 마찬가지니까요. 오히려 버추얼 펭귄 쪽이 더 귀여울 수도 있습니다. 버추얼 휴먼은 왜 인간이어야 할까요?


활발하게 활동 중인 버추얼 휴먼들 (한경닷컴)


버추얼 휴먼이 줄 수 있는 경험


우리는 익숙한 대상에게 친숙함을 느낍니다. 버추얼 휴먼들이 앞다투어 '좀 더 인간처럼'을 추구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정말 인간 같은 가상인간들은 우리에게 실제 사람과 같은 친숙함을 경험하게 합니다. 기업들이 점점 더 사실적인 버추얼 휴먼을 추구하는 것은 친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버추얼 휴먼이 펭귄이면 안될 이유가 없거든요. 사실 펭귄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버추얼 휴먼만큼의 퀄리티를 추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상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괴수 불가사리를 무찌르는 버추얼 휴먼 읏맨 (OK금융그룹)


소비자 역시 '인간과 얼마나 닮았는가'는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은 기업과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버추얼 휴먼이 인간과 똑같을수록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은 친숙함뿐만이 아니거든요. 버추얼 휴먼이 어딘가 어설프다면 우리는 불쾌감을 경험합니다. 이 구간을 불쾌한 골짜기라고 합니다. 이미 워낙 많이 알려진 내용이라, 이 글에서마저 다루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의 버추얼 휴먼들은 이미 불쾌한 골짜기 단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니까요.


불쾌한 골짜기를 건너온 버추얼 휴먼들은 우리에게 신선함을 느끼게 합니다. 분명 우리가 아는 가상인간들은 불쾌한 존재였는데, 이제 그 단계를 지났다는 점에서 신기함을 느낍니다. 기술의 정교함에 감탄하기도 하고, 실제 존재하는 인간처럼 대우해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상의 존재를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암묵적 약속에 익숙하니까요.


암묵적 합의에 큰 역할을 해준 세계관 코미디 장르 (피식대학)


현재 버추얼 휴먼의 인기는 이 단계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인간스러워지는 가상인간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신선합니다. 아직은요. 그러나 친숙함과 신선함은 각각의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똑같이'를 추구할 수 있을까?


버추얼 휴먼은 우리에게 친숙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형상에 친숙하기 때문에 버추얼 휴먼은 한 가지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우리가 '인간처럼'의 디테일에 한껏 민감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존재,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대상은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형상' 데이터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존재보다 어색한 부분을 미세하게 잡아낼 수 있습니다. 버추얼 펭귄에는 불쾌한 골짜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일 수 있습니다. 펭귄이나 코끼리는 조금 현실과 달라도 크게 어색하지 않거든요.


그럴듯하죠....? (BBC)


그러다 보니 버추얼 휴먼들은 점점 더 정교하게 인간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똑같이'는 언제까지고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방향성은 아닙니다. 똑같음이 주는 신선함은 언젠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언젠가 인간과 정말 똑같아 보이는 버추얼 휴먼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을 시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혹은 필요치 않게 될 수도 있고요. 사진 기술의 발명과 함께 더 사실처럼 그릴 필요가 없게 된 것처럼요.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더 똑같이' 그리기 위한 경쟁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버추얼 휴먼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기술의 발전이 성능 경쟁을 지난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차원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더 신선하게' 보관하는 냉장고는 이제 더 이상 소비자에게 매력을 어필하기 힘듭니다. 냉장고라면 이제 신선하게 보관해주는 것은 당연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자 이제 냉장고의 디자인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사실적으로 그릴 필요가 없어진 미술은 표현이나 의미 같은 좀 더 높은 차원의 영역으로 진화했고요. 언젠가는 정말 인간과 차이가 없는 버추얼 휴먼이 등장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좀 더 있음 직한 세계관으로, 좀 더 친숙함을 주기 위해 경쟁하게 될까요?



버추얼 휴먼이 줄 수 없는 경험


신선함이 사라진 버추얼 휴먼에게는 이제 친숙함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인간을 닮은 버추얼 휴먼이 주는 친숙함에는 한 가지 요소가 빠져있습니다. 바로 실존감입니다.


사실 지금도 버추얼 휴먼은 실제 사람과 거의 구별이 힘듭니다. (디오비 스튜디오)


버추얼 휴먼이 실제 사람과 같을 때 우리는 실재감을 느낍니다. 실재감이란 대상이 실물인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실존감이 빠져있습니다. 실존감은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느낌입니다. 한 글자 차이지만 여기서 느껴지는 간극은 큽니다. 버추얼 휴먼의 대역인 사람과 소통하더라도, 이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소비자가 알고 있습니다. 버추얼 휴먼과는 상호작용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단순히 SNS 상에서 이루어지는 대역과의 소통이 실제 인간과의 상호작용과 같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버추얼 휴먼은 무대에서 넘어지지도, 갑자기 날아든 벌레를 보고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런 장면을 연출할 수는 있겠지만요.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인간적이라고 부릅니다. 버추얼 휴먼이 인간스러울 수는 있어도 인간다울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 뒤에는 유일하게 실존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아이돌, 인플루언서 산업의 핵심은 실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잘생긴/예쁜 사람도 실제로 존재하는구나'라는, '심지어 마음씨까지 아름답다니'하는,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 내지는 환상을 줄 수 있는 것이 인플루언서의 핵심가치이지 않을까요?


실존감에는 유일하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같은 인간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 오직 한 명만 존재합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한 들 다른 사람이라면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특별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팬미팅에 가고, 콘서트에 갑니다. 단 한 명만 존재하는 그 사람과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서요. 버추얼 휴먼이 기술로 창조된 존재인 이상,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이것은 보안을 강화하고 NFT를 부여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버추얼 휴먼은 고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른 공간에 존재할 수 있고, 동시에 두 명이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이 글은 버추얼 휴먼의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버추얼 휴먼이 가지게 되는 경험적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딥 페이크를 사용해 만들어 낸 얼굴을 덧씌우거나, 처음부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얼굴이거나, 버추얼 휴먼의 역할을 하는 배우가 있거나, 인공지능을 통해 대화를 하거나, 기술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가상인간들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생생한 구현'의 경쟁이 끝나면, 남게 되는 것은 '가상인간을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될 겁니다.


버추얼 휴먼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든, 가상의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대상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은 존재도 단일 개체로 실존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언제나 기술이 가장 먼저 진보하고, 그 이후에 인식과 문화, 마지막으로 법과 제도가 정비된다고 합니다. 인플루언서들이 버추얼 휴먼으로 대체되는 동안, 한 편에서는 인공지능이 그림과 글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완벽한 지능과 자유의지를 갖춘 가상인간이 등장하게 될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필요할까요? 기술적인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어간다면,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그때 생물학적 인간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제는 우리의 인식과 문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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