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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딧쓴 Jan 15. 2023

퇴근길 지하철 한 칸은 클럽이면 어떨까

사회적 거리와 공간에 대한 인식

내일은 월요일입니다. 일요일 밤에 이렇게 무서운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퇴근 합니다. 서울에서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라 믿습니다. 출근이 두려운 이유는 일을 하기 싫어서라기보다 사람에 치이기 싫어서입니다.


나태지옥보다 무서운 출퇴근지옥 (이미지: MBC)


퇴근시간 지하철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지난주 금요일, 강남에서 사당 방면 2호선에 열차 지연이 있었습니다. 지하철 6대를 보내고 7번째 만에 겨우 몸을 구겨 넣고 집에 도착하니, 어디 멀리 고행을 다녀온 것만 같았습니다.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죠.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지옥철을 경험합니다. 왜 매일 아침 우리는 불쾌한 경험을 해야만 하는 걸까요?


개인과 공간


축제 기획을 할 당시, 공간에 대한 수업에서 '개인이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최소 공간크기'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네요. 정확한 거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좌우로 팔을 쭉 뻗었을 때 손에 아무것도 닿지 않을 만큼의 공간은 확보해주어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수용인원에 따라 필요한 공간의 최소 사이즈를 계산하는 것이죠. 물론 행사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절대 같은 밀도로 공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긴 했습니다만.. 질서를 지킨다는 전제 하에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의 최소 사이즈가 있다는 뜻입니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이러한 개인공간의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본인을 중심으로 15~46cm는 아주 사적인 공간으로, 연인처럼 밀접한 관계일 때에만 이 공간을 불편함 없이 공유할 수 있습니다. 46cm~1.2m 사이는 개인적인 거리로, 경계심이 없는 지인들도 이 공간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1.2m~3.6m는 사회적 거리로, 개인적인 관계보다 좀 더 거리가 먼 사무적인 관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리입니다. 주로 회의, 면담 등이 이에 해당하겠네요. 3.6m가 넘어가는 거리는 연설이나 강연이 이루어지는 거리로 사적인 친밀감을 형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사회적 거리라는 개념은 심리학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다룹니다. 가까워질 필요가 있는 사람과의 면담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가깝게 하거나 거리를 지켜주기도 하고,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의 반응을 통해 라포 형성의 단계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들과의 거리에 대해 본능적으로 여러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죠.


사회적 거리를 지켜주지 않는 인터뷰는 보는 사람도 묘한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미지: 양세형의 숏터뷰)


우리가 쾌적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간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출퇴근 지하철이 지옥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생면부지의 남과 몸이 거의 밀착된 정도의 거리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여름이나 비가 오는 날처럼 원래도 불쾌지수가 높은 날에는 말할 것도 없죠. 사회적 거리는 나이, 성별, 성격 등 개인차, 관계, 지위 문화 등 사회적 요인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맥락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공간에 대한 인식


출퇴근 지하철과 거의 동일한 인구밀도임에도 불쾌함은커녕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공간이 있습니다. 공연장이 그렇고, 축제의 행사장이 그렇습니다. 글의 제목에 들어간 클럽 파티도 마찬가지고요.


싸이의 흠뻑쇼 한 장면(이미지: 온라인 커뮤니티)


위 사진의 인구밀도를 보세요. 지하철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밀도가 낮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북새통에 물까지 뿌려댑니다. 그러나 누구도 불쾌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죽지요. 맥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끄러운 음악 속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뛸 수 있기에 사회적 거리라는 장벽이 희미해집니다. 사회적 거리 1.2m라는 기준은 절대적인 거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모르는 사람도 1.2m 안에 불편함 없이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맥락과 마음이 허락한다면요.


여기서 마음이란 공간에 대한 인식을 말합니다. 대상이 되는 공간을 어떤 공간으로 인식하는가에 대한 문제죠. 같은 흠뻑쇼 공간일지라도 안전관리를 위한 스태프로 참여했다면,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려서 휘청이는 것을 보면서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겁니다.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환희를 지르며 얼싸안을 수 있지만, 그저 길을 지나던 중이었다면 사람이 많은 것이 반갑지는 않을 겁니다. 같은 공간이어도 공간에 대한 인식에 따라 다른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공간에 대한 일종의 프레이밍인 셈이지요.


오늘의 꼬리칸은 EDM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출퇴근 시간에 한정하여 지하철 한 칸이 클럽처럼 운영되면 어떨까요? 인구밀도를 바꾸기는 어려우니 인식을 바꿔보자는 뜻입니다. 실제로 클럽처럼 조명도 어둡게, 아주 시끄럽고 신나는 음악도 틀어주면서요. 시끄럽다고 싫어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차피 미어터지는 퇴근길,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사람도 나타날 겁니다. 강남에서 클럽은 돈도 내고 입장하는데, 교통비 외 추가금액 없이 강남에서 타는 2호선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월요일은 EDM, 화요일은 힙합, 수요일은 락. 이용자가 많다면 칸 별로 컨셉을 달리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게 싫은 사람을 위해서는 맨 앞칸에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누구나 재즈칸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겠냐고요? 글쎄요. 인구밀도가 비슷하다면 피할 수 없는 지옥철을 즐기자는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첫 칸부터 끝 칸까지 클래식, 재즈, 락, EDM과 같이 선택지를 준다면, 자연스레 인구밀도는 뒤로 갈수록 높아지겠죠. 매일 출퇴근을 위해 타야만 하는 이동수단 '지옥철'에서 아주 잠깐의 일탈을 즐길 수 있는 '퇴근파티'로 인식을 전환할 수만 있다면 경험되는 불쾌감은 현저히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네,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임을 알고 있습니다. 서울 시장님이 출퇴근길 지하철 안전 대책으로 이런 소리를 했다면 다음날 사퇴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그저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 기획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하철에서 카페처럼 음악이 흘러나오면 왜 안될까요? 지하철 칸 마다 다른 컨셉으로 운영된다면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요? 실제로 가끔 그런 시도들을 마주치기도 합니다. 아주 가끔이지만요.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홍보하기 위한 대만 지하철 내부(이미지: 중앙일보)


여름에 지하철 바닥이 위 사진과 같이 랩핑 되어 있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지 않을까요? 공간 이용 경험은 아주 작은 인식변화로도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EDM 칸'이 단순히 불쾌감 감소를 위한 인식변화였다면, 반려동물이 케이지 없이 출입 가능한 펫 칸은 어떨까요? 장애인이 불편함 없이 출입 가능한 베리어프리 칸은 어떨까요? 지금은 'OO전용칸'에 대한 논쟁이 주로 갈등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하철을 칸마다 다른 형태로 이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아주 즐거운 일임에도 불구하고요.


사실 우리는 그저 불편함 없이 출근하고 싶을 뿐입니다. 출퇴근길이 즐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문화의 변화는 작은 상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즐거운 상상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내일 출근길은 추위를 피해 뭉쳐있는 펭귄무리를 떠올리며 출발해야겠습니다. 남극에 어울리는 음악은 이제 찾아야겠네요.


고개를 들어 내리는 문 방향을 확인하는 사회초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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