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에 의해 남아 있는 것들
사랑니를 뽑아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겁니다. 사랑니를 뽑으러 가기까지의 두려움과 발치 이후의 고통을요. 그 공포의 시간을 겪어본다면 한 번쯤 떠오르는 의문이 있습니다. '사랑니는 왜 있는 걸까..' 문장이 물음표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호기심이라기보다 푸념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쓸신잡과 지대넓얕의 애청자라면 마땅히 그 이유를 찾아봐야겠지요. 사랑니는 흔적기관이라고 합니다. 먼 옛날, 인간이 주로 과일과 식물을 먹을 때 음식을 더 잘게 짓이기기 위해 필요했다는 설명입니다. 턱뼈가 지금보다 컸을 때에는 문제가 없었던 기관이지만 지금은 필요 없어진 동시에, 작아진 턱뼈 안에서 악랄한 문제들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냥 남아있는 것이지요. 필요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으니까 남아있는 것. 지금은 필요 없는 것을 넘어 심지어 문제를 일으키는데도 남아있는 것.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랑니들이 많이 있습니다. 잇몸 대신 인식과 표현에 박혀서요.
건담을 알고 계신가요? 요상하게도 인식에 박힌 사랑니의 예시로 늘 건담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기동전사 건담.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전투병기 로봇인 그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주먹질을 하며 싸웁니다. 총도 쏘고 검도 휘두른다지만, 거대하고 단단해진 '사람'의 전투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그 시절 기준, 꽤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의 방위산업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건담이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로봇에 대한 상상력을 반영합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로봇들을 휴머노이드라고 합니다. 텔레토비에는 청소기 모양의 로봇도 나온다지만, 과거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로봇의 대다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역할을 대신할 로봇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휴머노이드의 개발이 활발했던 시기도 있었지요. 로봇의 존재 자체로는 더 이상 최첨단 기술이 아니게 된 지금, 오히려 바퀴 달린 형태의 로봇이 더 많이 상용화되었습니다. 필요에 의한 디자인으로 변경된 것이죠.
건담은 재미를 위한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그렇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고 다른 사례도 준비했습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다크모드는 어떨까요? 우리가 가진 디스플레이는 대부분 기본적으로 검은색입니다. TV도, 모니터도, 스마트폰도 전원을 꺼두면 검은색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다시 흰색 바탕을 깔고 사용했습니다. 디스플레이 이전에 우리가 주로 보던 대상, 종이가 그랬으니까요.
우리가 하얀 종이를 사용한 이유는 종이 위에 물감, 잉크 등을 얹었을 때 색의 간섭이 가장 적었기 때문입니다. 종이 위에 의도한 대로 색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색은 하얀색이니까요. 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흰색 종이를 사용했으니까, 디스플레이에도 하얀 배경을 적용하고 그 위에 글과 그림을 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부분의 서비스가 다크모드를 지원합니다. 어두운 배경이 눈의 피로감을 덜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전력소모도 줄여줍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빛을 발하는 방식의 화면에서는 굳이 흰색을 쏘아서 눈을 괴롭힐 필요가 없던 것이죠. 오히려 컴퓨터가 처음 보급될 당시에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기본이었습니다. 지금은 도스모드라고 부르는 그 모습으로요. 거기에 흰 배경을 덧씌운 것은 '그래왔으니까'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인식뿐만 아니라 표현에도 뽑지 않은 사랑니들이 보입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은 순환선이죠. 남쪽과 북쪽, 동쪽과 서쪽으로 향하지 않고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운행합니다. 두 열차는 외선순환과 내선순환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외선순환과 내선순환이라는 표현을 듣고 어느 방향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2호선을 기다리다가 "OO역 방향으로 가는 내선순환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내선순환/외선순환이라는 표현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부분은 들어봤자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거든요. 실제로 유용한 정보를 주는 부분은 'OO역 방향'입니다. (시계방향이 내선순환, 반시계방향이 외선순환입니다.) 알아듣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사용해 왔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부릅니다.
위 이미지는 다소 극단적인 예시지만, 실제로 무엇인가를 취소하는 과정에서 [취소 / 확인]의 선택지를 만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합니다. '취소 버튼을 취소'하는 말장난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지금처럼 대부분의 앱 서비스가 고도화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팝업에서 취소/확인의 선택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취소 프로세스에서도 같은 버튼이 적용되어 발생한 일입니다. 지금은 UX라이터들이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고 있습니다. 사용자 경험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써왔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이던 지난 2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중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은 재택근무였고요. 몇몇의 발 빠른 기업들은 메타버스 오피스를 도입했습니다. 실제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처럼 아바타를 움직여 돌아다닐 수 있는 가상공간의 디지털 사무실을 구현한 것이지요. 디지털 사무실이 필요한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는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일할 수 있음에도 다시 가상공간이라는 제약을 만들어야 했을까요?
다양한 의견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많은 경우가 '기존 사무실(업무) 경험의 재현'으로 수렴될 겁니다.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일종의 관성입니다. 사실 기존 경험의 재현 외에도 메타버스 오피스는 이점이 많습니다. 구성원이 출퇴근에 쓰는 비용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고, 기업은 사무실이라는 오프라인 공간의 유지비를 아낄 수 있지요. 다만, 이 경우라면 메타버스 오피스는 필요 없습니다. 재택근무로도 충분하니까요. 온라인 상태임을 알 수 있다면 캐릭터의 위치를 통해 출근을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메타버스 오피스는 잠시 주목받았던 시도였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필요가 없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사례가 되었습니다. 존재의 이유가 관성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성은 물체가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입니다. 움직이고 있던 물체는 계속 같은 움직임을 유지하려는, 멈추어 있던 물체는 계속 멈추어 있으려는 힘이지요. 기존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별도의 에너지가 추가로 필요합니다. 먹고 사느라 에너지가 부족한 우리가 기존에 하던 대로 하게 되는, 관성에 몸을 맡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성을 유지하는, 사랑니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따금 더 큰 비용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잇몸의 염증정도는 다행인 축에 속하지요.
증기기관차가 처음 등장할 당시에는 기관사가 열차의 맨 앞에 탑승했습니다. 기관실이 없는 완전한 오픈카였죠. 기존의 이동수단인 마차가 그랬고, 당시의 차량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래왔으니 그렇게 만들었을 뿐인 거죠. 그 대가로 많은 기관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식 속 사랑니를 뽑지 않은 대가로요.
여전히 많은 결정들이 관성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심지어 너무 깊게 박힌 사랑니는 뽑을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키보드 배열을 쿼티(Qwerty) 자판기라고 합니다. 쿼티 자판기가 상용화된 이후, 더 인체공학적이고 더 타이핑 효율이 좋은 키보드들의 수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쿼티 자판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죠.
관성에 의한 의사결정은 별다른 생각 없이 사랑니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위험을 일으킬지 고려하지 않은 채로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뽑아야 함을 알면서도 무서워서 가지고 있는 사랑니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