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획자 에딧쓴 Mar 24. 2023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법

심리학으로 경험의 접점을 기획하기

조금 거창한 제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도해 봤습니다. 보통 공간을 기획한다고 하면 멈춰있는 상태의 무언가를 설계한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공간에도 엄연히 시간의 흐름이 있고, 공간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가 있습니다. 인터랙티브 요소를 넣어서 참여자(방문자)와 상호작용 하도록 만들 수도 있지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유현준 교수님. 공간은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 유튜브 셜록현준


공간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간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공간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제목에 생명력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에게 생명력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살아있는 '상대방'으로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이 공간에서 생명력을 느끼도록 하고 싶다면, 공간을 살아있는 상대방으로 인식하도록 하면 됩니다.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말을 걸면 됩니다.



공간이 말을 거는 방식


공간은 여러 방식으로 방문자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기억나는 몇 가지 예시를 소개해드릴게요. 강릉에서 방문한 한 빙수 전문점은 엄청난 수의 안내문으로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미세먼지가 들어옵니다. 창문을 열지 말아 주세요."

"빙수가 준비된 뒤 10분이 지나도 찾아가지 않으시면 폐기처분합니다. 반드시 바로 찾아가 주세요."

"남자 화장실은 3층에 있습니다. 열쇠를 가져가세요."

"문을 꼭 닫아주세요."

"휴지는 반드시 휴지통에 버려주세요. 변기가 자주 막힙니다."

등등.


어떠신가요? 저는 있는 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후다닥 빙수만 먹고 나왔습니다. 별로 오래 있고 싶지 않더라고요. 아, 혹시 테이블 회전율을 높이려던 전략이라면 성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내 자체가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주 묻는 질문들을 미리 답해주고 있으니, 효율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을 거는 방식에 있어서는 과한 잔소리를 계속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깐깐한 공간이라는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다음은 석촌호수 근처의 뷰클런즈라는 카페입니다. 여긴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이름을 소개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제 책에도 등장했던, 휴식을 주제로 하고 있는 카페입니다. 인테리어부터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진정한 쉼이란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음료를 주문하면 어떤 책 속의 글귀가 담긴 카드를 함께 건네줍니다. 카드에는 휴식과 관련된 문장이 적혀있습니다.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말을 건네는 것이지요. 문장을 곱씹어보며 공간을 음미하게 됩니다. '나한테 휴식이 뭘까'를 생각하면서요.

못 간 지 꽤 됐는데, 디자인이 바뀐 것 같네요. | 트위터 @murrmur1


마지막으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에 남는 식당이 있습니다. 이곳은 서빙을 해주시는 이모님이 직접 말을 거셨어요. 꽤 추운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리에 앉자 이런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따뜻한 물 드릴까요? 시원한 물 드릴까요?"


마침 얼어붙은 손을 녹이고 싶던 참이라, 따뜻한 물을 부탁드렸습니다. 사장님이 굉장히 섬세하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간이 말을 건다'는 표현이 꼭 비유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말을 건넬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건네는 말에 따라 이용자가 경험하는 느낌은 매우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골목식당에서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는 인사말처럼요.

맛있게 많이 먹으라는 좋은 의미였겠지만, 불편하게 들린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 SBS


말을 건네받는 순간의 경험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프로그래밍이 되어있습니다. 누군가 말을 거는 순간 반응을 생각하게 되지요. 어떤 말로 대답할지 고르는 것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반응은 무의식 중에 이루어집니다. 대답할 준비를 하거나, 나를 부른 것인지 확인하거나, 어떤 정서가 유발된다거나 하는 식의 본능적인 반응들이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말을 거는 순간 말을 거는 상대를 인식하게 됩니다. 특정한 객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설령 그 대상이 무생물일지라도요.


말을 거는 순간, '별 의미 없이 지나가던 배경'에서 '내가 지금 상대해야 하는 대상'으로 초점이 다시 맞춰집니다. 길을 걷다가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지만, 누군가 나를 붙잡고 말을 건다면 그 순간 그 사람의 존재가 인식되는 것처럼요. 이 경우에도 역시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 '인상'이 결정됩니다. 인식 다음 인상, 인상 다음 기억인 셈이지요.


말을 거는 방식은 공간을 존재로 인식시키는 동시에 어떠한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 작업입니다. 만약 어떤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면, 혹은 어떤 공간을 기획 중이라면, 공간에 방문한 사람들이 어떤 말을 듣게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제일 처음 말을 거는 존재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에 따라 방문객은 어떤 대답을 하게 되는지요. '어서 오십시오'라는 돋움체 문장이 쓰여있는 초록색 발매트일 수도,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혀있는 안내문일 수도, 직원의 반가운 인사일 수도, 혹은 입장과 동시에 주어진 어떤 안내 책자의 표지 글귀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방치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리번거리면서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거나, 어떤 안내문을 봐야 하는지 찾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그 말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유도해내고 있는지도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강릉의 빙수집처럼 거부감을 주는지, 뷰클런즈처럼 우리 브랜드의 철학을 전하는지요.



이정표와 텍스트의 역할


당장 적용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를 알려드릴까 합니다.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이정표를 엑스배너로 인쇄하는 경우가 많지요. 보통 담기는 내용은 행사 이름, 장소, 시간,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 정도입니다. 엑스배너가 뭔지 모르신다면, 아래 사진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한 번쯤 보신 적은 있을 거예요.


이 녀석입니다. | 디나래


아무런 말도 건네고 있지 않지요. 아직 우리의 공간(행사장, 가게 등)에 도착하기 전이니까요. 하지만 이곳에서부터 말을 거는 방식으로 경험의 접점을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멘트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거의 다 왔습니다!"_행사 장소가 찾기 어렵거나 복잡한 곳에 있다면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_행사 홍보 기간이 길었다면

"오느라 욕봤네"_동창회 같은 가벼운 모임이라면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시다니"_유쾌한 성격의 행사라면

(멘트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아이디어보다는 방식에 집중해 주세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의 기능만 수행하던 배너가, 참가자에게 말을 걸고 환영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텍스트의 힘이지요. 텍스트가 말을 거는 형태를 취한다면 같은 환경, 같은 순간에서도 참여자의 경험이 달라지게 됩니다.


요즘은 텍스트의 힘, 말을 거는 것의 위력을 체감할 때가 많습니다. UX라이팅 관련 콘텐츠의 발행량만 봐도 그렇고, 회사로 밀려 들어오는 프로젝트들도 그렇고요. 금융앱부터 시작해서, 많은 서비스가 사용자에게 말을 걸고 있거나,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공간뿐만 아니라 디지털 공간에서도 말을 거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큰 것 같아요.


기획자로서는 보다 많은 접점을 만들고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주고 싶어 하는 편입니다. 물론 텍스트가 많아지면 작은 화면에 표시되는 내용이 많아 지저분해질 수 있지만요. 디자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래서 기획자는 매번 디자이너, 개발자와 대결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언제나 좋은 의견 주시는 디자이너분들과 개발자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합니다.

꼭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