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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자 에딧쓴 Jul 18. 2023

기획자로서의 즐거움은 심리학에 있었다.

심리학이 가져다준 자유

일의 재미


저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루 중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일, 내가 평생 해야 하는 사회활동은 내가 재미를 느껴야만 지속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 보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해라'라는 말을 신조로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더라고요.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자유.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너는 무엇을 하면서 살 거야?'라고 종종 묻는 친구가 있습니다. 한 번은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그래도 일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스위스 뮈렌의 설산에서 보드도 타보고, 맑고 깨끗한 사이판 바다에서 프리다이빙도 즐겨보고,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하바나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마치고 돌아온다면, 다시 일을 찾을 것 같아요.


일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내 주도하에 무언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때의 성취감만큼 재미있는 놀이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획자를 선택했고, 여전히 기획자로 살고 있습니다.



기획자 정체성


제 정체성을 기획자로 결정한 '그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욕심 많던 대학생 시절, 넘치는 의욕 덕분에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댔습니다. 그중 하나가 연합동아리였는데요. 군대도 가기 전인 어리고 서툰 시절, 어색하기만 했던 다른 대학 사람들과 함께 영차영차 세미나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해당 영역에서는 학부생이 주도하는 행사가 전혀 없던 시기였기에, 전국에서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까지 약 150명 정도가 모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만든 행사에 모였다니, 괜히 우쭐하기도 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요.


그때가 '그날'은 아직 아니고요. 행사가 끝난 다음 해, 군대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이 힘든 시기였지요. 몸이 힘든 것보다는, 무의미가 주는 무력감이 심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은 물론 가치 있는 일이지만요. 제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이전에 전혀 하지 않았던,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일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었거든요. 개인의 존재가 지워짐은 물론이고요. 그때는 461번 훈련병이라는 정체성이 우선이니까요.


461번. 번호가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시간은 흘러 꿀 같은 휴가날이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교직원으로 일하는 선배와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요. 그 선배가 툭 던져준 말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네요. 


너 작년에 했던 세미나, 거기 참석했던 고딩이 이번에 우리 학과 입학했다더라,
그거 듣고 심리학 해보기로 했다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기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고, 벅차오르기도 했고, 동시에 두렵기도 했지요. 내가 만든 행사가 누군가의 진로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그래도 되나 싶었거든요. 남은 군생활 내내 그때의 감정을 곱씹어봤습니다. 결론은 '이 일은 나를 설레게 한다.'로 내렸고요.


전역 후 연합동아리로 다시 돌아가, 이번엔 더 크게 일을 벌여보았습니다. 전문가들도 초빙해 보고, 기업 참여 부스도 설치하고, 대학생-고등학생 멘토링 프로그램까지 추가해서요. 행사 당일, 현장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점검 차 모든 구역들을 돌아보러 다녔습니다. 강당에서는 전문가의 강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부스에서는 담당자가 학생들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해주고 있었지요. 멘토링 공간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지방에서 올라온 고등학생이 여러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삶에 한 조각 기억으로 남을 장면들을 둘러보면서 생각했지요.


"이런 일이라면 평생 해도 즐겁겠다."



주체적 자유


기획자가 느낄 수 있는 일의 즐거움은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든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


경제적 자유도 좋지만, 기획자로서는 주체적 자유를 더 갈망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내가 만들어내는 무엇.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이것을 자유롭게 만들어내고 확인할 수 있어야 일이 의미 있어진다고 믿거든요. 의미 있고 가치 있다 느껴야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요.


일이 재미가 없어 고민이라는 친구에게는 '네가 지금 하는 일의 주도권과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다고 느끼는지' 물어봅니다. 대부분 주체성을 빼앗기면 재미를 잃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뿐, 삶의 재미가 다른 곳에 있는 친구라면 이런 고민 자체를 하지도 않으니까요. 가끔은 주도적으로 일을 만들어가고 있을지라도, 결과물이 최종 소비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없는 친구들 역시 번아웃에 빠지곤 합니다.


결국은 일에서 주체적 자유를 가지고,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인 것 같아요.


1. 능동적인 문제 해결

2. 1이 만들어내는 영향력 확인



심리학, 그리고 심리학적 사고


위 두 가지는 제가 기획자에게 심리학을 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킬이나 직무지식, 커리어 성장이 목표인 기획자보다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싶은 기획자 들이라면요.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주거든요.


기획자가 만들어내는 것의 최종 소비자는 대부분 사람이기 때문에, 기획자의 문제해결은 사람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제가 축제기획, 마케팅, UX라는 정신없는 직무전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심리학 베이스인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해요. 면접에서 "갑자기 왜 이쪽 일로..?"라는 질문을 매번 받았었고, 늘 '심리학 관점에서 이런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설득할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 내가 만들어내는 프로덕트, 결과물들을 소비자가 어떻게 경험하는지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지각하고,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정서를 느끼고.. 전부 다 심리학의 영역이니까요. 기획자라면, 내가 어떤 경험들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미 사회에 나와 일을 하고 있는 기획자들에게, 혹은 이제 곧 학교를 졸업할 예비 기획자들에게 심리학을 다시 전공하라는 것은 무리한 권유임을 알고 있습니다. 취미 영역에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연구 설계와 사회통계부터 기초를 다지다 보면 심리학에 학을 뗄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심리학적 사고(psychological thinking)'라는 주제를 다뤄보려 합니다. 저도 심리학 교수는 아니니까요. 그저 기획자의 입장에서 심리학스럽게 생각하는 법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려 4년을 쏟아부을 필요 없이요. 심리학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다 둘러보기엔 이론과 학자는 너무나 많으니까요. 모든 내용을 살펴보기보다 심리학스러운 생각법만 훔쳐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가 얼마 전까지 다뤘던 주제인 경험 기획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UX, CX, BX 나누지 말고 모두 사람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HX로 바라보자는 건방진 주장을 했었지요. 그게 맞는 것 같아서라기보단, 제가 할 수 있는 접근법이라서에 더 가깝습니다.


정답보다는 해답을 찾는 사람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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