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그게.. 기획에는 도움이 됩니까?
저는 커리어가 망한 기획자입니다. 이력서가 엉망이에요. 전체 경력은 길지 않은데 거쳐온 회사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몸 담고 있는 회사는 다섯 번째 직장이지요. 그리고 제가 지나온 다섯 회사는 모두 하는 일이 다릅니다. 그나마 짧은 경력마저 의미가 없는 것이죠. 제가 세 번째로 퇴사한 회사의 입사동기들은 벌써 대리가 되었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주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거쳐온 회사들의 업종이 모두 달라도, 제가 그 안에서 하는 일은 전부 기획이었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아주 다양한 기획을 건드려봤어요. 공연, 세미나, 커뮤니티, 교육, 워크샵, 축제, 마케팅.. 돌고 돌아 지금은 사용자 경험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기반으로요.
"동종 업계 경력 상 신입인데, 완전한 신입이라고 하기도 좀... 애매한 부분이 있네요."
이직을 할 때마다 그러시더라고요. 저도 동의합니다. 기본적인 문서작업이나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 진행, 일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경험이 쌓여있지만, 정확히 그 분야에서는 아니니까요. 제 입장에서는 제가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끼면 그만입니다. 일을 선택할 때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물론 돈도 많이 벌고 싶ㅇ..)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다소 어려운 결정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쪽 분야에서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심리학을 베이스로 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회사에 입사할 때는 면접 과제를 했었습니다. 제가 가진 관점을, 회사의 일을 할 때 어떤 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감을 잡기 위해서요. 사실 제게도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을지 스스로 확신이 필요했거든요.
과제 내용은 두 브랜드의 배달 주문 앱을 사용해 보고, 소비자의 사용 경험을 비교분석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UX 디자인 따로 배우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용자 경험(UX)이 비단 비주얼 디자인 영역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하겠다고 했습니다. 두 브랜드가 자체운영하는 앱에서 주문을 해보면서 각각의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세 가지 기준을 세웠고, 각 기준에 따라 사용자의 심리가 어떻게 다른 경험을 하는지 정리했어요. 마지막으로는 각 앱의 주문과정과 배달의 민족에서의 주문과정을 추가로 비교하고, 발표 전에 한 페이지 보고서로 정리해 드렸고요. 발표를 준비하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심리학 관점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요. 다행히 회사도 그렇게 생각해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지금까지도 TX컨설팅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TX는 텍스트 경험이에요)
심리학은 직업의 세계에서는 참 쓸모가 애매한 학문입니다. 기술이 되어주지 못하는 전공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요.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이다 보니,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일에 써먹을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뾰족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지요. 모든 요리에는 소금이 필요하지만, 소금만 가지고는 어떤 요리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기획도 마찬가지네요. 모든 일에는 기획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놀러 가는 여행에서도요. 사업도 기획이 필요하고, 전략도, 상품도, 공간도, 이벤트도..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이 기획을 합니다.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기획자. 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뾰족하게 자신의 무엇을 만들어야 하죠.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기획자들이 자신의 뾰족함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심리와 기획. 분명 필요하긴 한데, 무기로 쓰기는 애매한 두 가지 영역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한다면, 충분히 뾰족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사람은 많이 못 본 것 같거든요. 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심리학의 관점에서 기획을 바라보면 경험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기획의 최종 결과물을 소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까요. 상품이든, 공간이든, 이벤트든, 최종적으로는 사람이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경험(UX)에 한정되어 있던 논의들이 고객 경험(CX)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방향성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시장은 주고 싶은 것을 어떻게 줄 지 고민하는 단계를 넘어, 받게 되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소비자 경험, 고객 경험, 디지털 경험, 브랜드 경험.. 경험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라면 심리학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충분히 많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경험을 하는지, 경험이 어떻게 인식되는지, 기억에 어떻게 저장되는지.. 인간과 인간의 경험은 심리학의 오랜 연구주제였으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경험기획에 대한 글을 써왔습니다. 인간 중심으로 경험을 다루기 때문에 HX라고 이름 붙여서요. 경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책도 내보고, 강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경험이 발생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 지점에 대한 글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험이 이루어지는 지점, 접점에 대해서요. 경험기획이 좀 더 세분화된다면 접점기획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부터는 기획자의 입장에서 심리학을 써먹는 방식들에 대해, 그 관점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기획자 분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굳이 기획자라는 직함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상품을 만들거나, 무언가를 운영하는 분이라면 관심 있을만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 파는 것에 심리학을 적용해보고 싶은 분들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글을 쌓아보려고요. 궁금한 부분이 있거나 나누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편하게 말 걸어주세요. 댓글도, 이메일도 열려있습니다.
종이책은 요렇게 나왔었고요. 밀리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