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중요한 부분은 숫자로 나타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해서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의하시나요? '한글을 쓸 수 있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는 어떠신가요? 여전히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믿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데이터로 증명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충은 모두 여기서 출발하니까요.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카피라이터가 쓴 문장에 내가 한 단어를 얹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디자이너도 비슷한 고충을 겪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클라이언트가 보기에 다른 색이 더 예뻐 보이면 디자이너의 기획의도는 뒷전이 되기 쉽습니다. '예뻐 보인다'의 기준을 수치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결과물이 바로바로 숫자로 증명되는 영역들은 '이게 더 좋다'의 기준이 명확합니다. 가습기는 '전기를 얼마나 소모해서 몇 시간 동안 얼마나 넓은 공간에 몇 퍼센트의 습도를 올릴 수 있는가'로 명확하게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고 카피는 어떤 게 얼마나 더 좋은지 명확하게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두 가지 문장을 모두 공개해 본 이후에 어떤 문장이 더 많은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했는지 사후비교만 가능하지요. 그것도 충분히 많은 사람에게 실험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본업의 능력치보다 설득력이 중요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공개했을 때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디자인보다, 클라이언트를 기가 막히게 설득해서 "OK"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디자이너가 더 유리해지는 것이죠. 물론, 공개된 이후 성과가 얼마나 났는지도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운'의 요소가 더해지잖아요. 결국 디자인 역량이 아니라 설득력이 성과를 가르는 상황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본업인 디자인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본업을 통과시키기 위해 말과 글로 설득하는 상황이요. 헷갈릴까 봐 디자이너로 예시를 들긴 했는데, 카피든 UX라이팅이든,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과 졸업생들은 사실 증명과 그리 친하지 않습니다. 저는 근의 공식 이후에 증명에서 손을 떼었거든요. 그나마 논술이 증명 비슷한걸 하긴 하는데, 논증은 설득력을 더하는 과정이지 정답을 도출하는 과정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제 기술의 발전으로, 문과인 저도 아주 쉽게 증명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상황은 이미 옛날이야기고요, 이제는 두 문장 중 고민된다면 일정 기간 둘 다 공개해서 더 반응이 좋은 문장을 고를 수 있습니다. A/B 테스트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꼭 두 문장일 필요도 없지요. 세 문장도, 네 문장도 가능합니다. 그만큼 기간과 대상이 커지긴 해야겠지만요.
그래서 이제는 글을 쓰는 사람들도 데이터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어떤 문장이 실제로 얼마나 성과가 좋았는지 확인해 볼 수 있으니까요. 클릭을 더 많이 유도했거나, 같은 과정을 겪는데 시간을 얼마나 단축시켰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이렇게 수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정량적 데이터라고 합니다. 체류시간은 몇 초로 수량화하여 비교할 수 있고, 더 많은 관심유도는 몇 명에게 보여준 결과 몇 명이 클릭했다는 클릭률로 비교해 볼 수 있지요.
통계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문과인에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이런 수량적 데이터를 단순히 크기비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설명할 수 있거든요. 데이터 기반의 객관적 비교라니, 꿈만 같은 이야기입니다. "[클릭해 보세요]보다 [클릭해 주시기 바랍니다]가 정중해서 더 좋은 거 아니야?"라는 클라이언트의 의견에, "저번 광고집행 때 [클릭해 보세요]의 클릭률이 8% 더 좋았습니다."라고 받아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 때문에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에 매료되어 있는 문과 동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걸 원하는 결정권자가 많기도 하고요. 저번 글에서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고 했었는데요. 데이터에는 정량적 데이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 데이터인 '정성적 데이터'도 놓치면 안 된다고 봅니다.
편의상 정량적 데이터를 데이터라고 부르고, 정성적 데이터는 느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느낌'은 일반적인 경우, 수치화하기도 어렵고 따라서 증명하기도 어려운 분야입니다. 하지만 증명하기 어렵다고 해서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요.
유튜브에서 영상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는 무엇이 있을까요? 조회수? Like 수? 좀 더 이 영역에 익숙한 분이라면 시청지속시간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댓글 수로 반응을 볼 수도 있고요. 마케팅 회사에서는 이런 수치들을 통틀어서 참여도(인게이지먼트: engagement)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모두 데이터네요.
하지만 시청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영상의 내용을 제외하고, 영상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무엇이 있을까요? 시청자들이 영상을 평가할 때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은 바로 댓글입니다. 댓글 수가 아니라 댓글 내용이요. 똑같은 내용의 똑같은 영상에, 첫 댓글만 다르게 달아두어도 이후의 반응들이 달라집니다. 심지어 요즘은 영상을 보기 전에 댓글을 먼저 보고 볼만한 영상인지 판단하기도 하고요. 100만 조회수의 영상이라는 것이 클릭을 유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상에서 받는 '느낌'은 댓글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큽니다.
다시, 이번에는 영상을 업로드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볼까요? 100만 조회수를 달성하는 것은 물론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댓글이 하나도 없다면 어떨까요? 절반이 악플이라면요? 영상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댓글의 분위기, 댓글이 주는 '느낌'은 아주 유의미한 지표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의 유튜브 댓글입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다른 지표들보다, 영상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조회수가 높다 보다 의미 있는 정보이기도 하고요. 크게 공감해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댓글이 생각납니다.
귀를 즐겁게 해 준 노래(영상)의 댓글에는 찬사와 감탄이 있지만,
가슴을 울린 노래의 댓글에는 자신의 인생과 사연이 있다
댓글을 캡처하려고 오랜만에 들으러 간 노래인데, 해당 영상의 댓글에도 저 이야기가 있네요. 그리고 노래를 부르신 당사자의 댓글도 달려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느낌'을 좋아합니다. 이런 느낌이 감정을 건드리고, 기억에 남고, 다시 찾게 만들거든요. 조회수가 높아서 그러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느낌을 줄 수 있기에 조회수가 높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본질은 데이터가 아니라 느낌인 것이죠.
(궁금할 분들을 위한 링크: https://youtu.be/cS-IiArGmcU)
서비스 내의 글인 UX 라이팅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부터 계속해서 UX라이팅을 사용성 측면과 브랜딩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고 주장했었죠.(사용성 글쓰기, 브랜딩 글쓰기, 돈이 되는 글쓰기) 감정을 건드리고, 기억에 남고, 다시 찾게 만드는 것. 브랜딩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나요?
최근, 캡처할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간 화면임에도 기억에 남았던 문장이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 듣는 분이 많을 것 같은데, 지역기반의 배달 서비스 '두잇'이었거든요. 관악구 인근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커뮤니티 기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동네인증이 필요했는데요, 동네를 선택하고 인증을 기다리는 몇 초 사이에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 대신 이런 문장이 보였습니다.
번개보다 빠르게 확인하고 있어요.
실제로 번개보다 빠르게 지나가서 캡처할 수 없었습니다. 기억에 남더라고요. 강의에서 가끔 소개하기도 하는데요. 협업툴 슬랙의 업데이트 문장도 그렇습니다. 한 번 보면 기억에 남아요. 유쾌한 '느낌'을 주거든요.
사용성보다 이 느낌이 무조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문장이 재미있어도 사용성이 엉망이면 다시는 그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지 않거든요. 다만, 데이터로 나타나지 않는 영역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브랜딩을 위해서 라면요.
브런치는 일반 글에서는 조회수와 좋아요 수 이외의 데이터(숫자)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체류시간이라든가, 구독자 전환이 얼마나 이루어진 글이라든가, 완독률이 얼마나 된다거나 하는 정보들이요. 브런치북만 제한적으로 완독률과 독자 정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요. 기술적인 문제인지 그 배경은 모르겠지만, 그만큼 정량적인 지표보단 글이 주는 '느낌'이 중심이 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데이터를 알려주지 않음'이 주는 느낌도 있으니까요.
이러한 '느낌'을 수치화해서 정량 데이터로 바꾸고, 비교하고 검증하고 연구하는 게 심리학이 하는 일입니다. 무슨무슨 법칙, 무슨무슨 효과만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요. 이러한 '사고의 틀'로서 심리학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책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느낌 있게 잘 써보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이 글의 분량조절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