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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Oct 20. 2021

에스컬레이터 도미노

여느 날과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환승을 하기 위해 사당역에서 내렸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있을 만큼 익숙한 길이라 앞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잠시 땅을 보고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사람이 에스컬레이터 코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뭐야?' 하고 고개를  순간  하고 머리가 돌았다. 에스컬레이터 위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밀려 넘어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보니 위쪽에 계시던 분이 중심을 잃으셨고 그 무게에 밀려 뒷사람들이 넘어진 것 같았다. 천만 다행히도 그분 바로 뒤쪽에 서 있던 젊은 청년들이 붙잡아 피해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백 번 천 번 오간 익숙하고도 지루한 길. 그 길에 서서 나는 얼굴에 돋은 소름을 매만졌다. 그 익숙함이 고맙고도 오싹해졌다.


나는 원래 사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러 가는 길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4호선 끝쪽에 탄다. 그런데 그날은 오후 출근 중이었으므로 마음이 조급하지 않아 아홉 번째 칸이 아닌 여유롭게 여덟 번째 칸에 올라탔다. 아마 아홉 번째 칸에 탔다면 그날 조금 더 빨리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을 것이고, 아마 에스컬레이터의 맨 아래쪽에서 넘어진 사람들의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앞에 젊은 청년들이 넘어진 분을 붙잡지 못했더라면 더욱 끔찍했을 테고.


뉴스에 나오는 안타까운 사건 사고들을 볼 때마다 어쩌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결론지어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기에 상상하기 어려워 그럴 수도 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버스를 타고 가던 길에, 여느 날과 다름없이 길을 걷던 중에, 사고는 늘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에 찾아온다. 첫 번째 말을 손끝으로 툭 하고 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도미노가 한 번 시작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일으키는 것처럼.


"내 바로 코앞에서 사람들이 넘어졌어."


문자를 나누고 있던 이에게 놀란 마음을 쓰러 내리며 메시지를 보냈다. 누군가에겐 바로 코앞에서 닥친 일이 누군가에겐 자신이 당한 일이 되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결과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이유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아홉 번째 칸에 탔느냐, 여덟 번째 칸에 탔느냐에 따라 운명은 엇갈리기도 하는 것이다.


넘어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손을 털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던 수많은 사람들도 다시 제 갈길을 향해 걸었다. 나 역시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2호선 승강장으로 향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렇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고 자책할 필요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자만할 수도 없이, 도미노가 서로를 지탱하고 안전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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