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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Oct 08. 2018

서로의 전부를 알 수는 없잖아

그래야 다른 우리가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에도 부족한 면이 많다. 왜냐하면 대부분 상대방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잊을 때가 많다. - 고영성·신영준, <일취월장> 中


올해는 미투운동(Me Too Movement)이 뜨거웠다. 문화예술계, 정치계, 법조계 등을 넘어 일반 직장 환경 속에서의 성평등 인식 변화에도 매우 큰 변화를 일으켰다. 나에게도 미투운동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특히 텔레비전 속에서 만나던 반가운 인물들이 가해자로 밝혀졌을 때는 더더욱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그중 몇몇 이슈 중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왜 그 당시에 말하지 못했을까?'하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말하지 못했다 쳐도, 그 다음에 분명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왜 '싫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민감했던 이슈였던 만큼 혼자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지하철에서 직접 겪었던 경험 하나가 떠올랐다. 늦가을 혹은 어느 초겨울날, 매우 지친 상태로 지하철 좌석에 앉아 집에 가고 있었다. 그날 나는 치마를 입고 있었고 내 옆에는 한 아저씨가 앉았다. 아저씨는 손이 시려웠는지 자신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아래로 넣었는데 아저씨의 손등이 내 다리에 닿았다. 왠지 기분이 나빠 최대한 그 아저씨의 반대쪽으로 몸을 옮겼지만 손등은 여전히 내 다리에 닿았다. 어렵게 차지한 좌석에서 일어나긴 싫었고, 손 좀 치워달라고 말하자니 상황이 애매했다. 결국 나는 그 손등이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당한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바바리맨을 만났을 땐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무작정 내달렸고, 에스컬레이터에서 갑자기 엉덩이를 치고 가는 사람에게, 버스나 지하철에서 불필요하게 몸을 밀착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성희롱을 한 것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것은 내 인생에 연관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문제였던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니, 미투운동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 말끔하게 이해되었다. 그들이 왜 그 당시에 말하지 못했었는지,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과 입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비슷한 경험을 겪지 않았더라면, 피해자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단 한 번도 비슷한 경험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몰라줘서 답답할 때가 있다. 반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겠어서 답답할 때도 있다.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들도 있지만, 아무리 말로 설명해줘도 알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 다시 태어나 상대방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보려 한다. 내가 너의 전부를 알 수 없고, 너도 나의 전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겸허히 인식하는 자세로 바라보려 한다. 그래야 다른 우리가 같이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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