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검진이 있다면 단연 산부인과 검사다.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버티다 울며 겨자먹기로 병원에 간다. 과연 내가 멀쩡히 검사를 받고 나올 수 있을까 걱정을 한 아름 안고 검사실로 들어서면 의외로 어렵지 않게 검사를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의사 선생님의 태도 덕분이다. 우물쭈물하는 나와 달리 의사 선생님은 우리가 마치 차 한 잔을 함께 마실 것 같은 목소리로 "들어오세요"라고 하시곤, 너무 아무렇지 않게 검사 준비를 하시니 오히려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산부인과 특유의 자주색 의자에 누워 검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생각했다. '매일 남의 몸속을 보고 일하는 의사 선생님은 얼마나 힘이 드실까'하고.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부끄러움을 잊고 내 건강을 살펴볼 수 있어 감사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무덤덤한 표정으로 '좀 더 살펴볼게요'라고 하실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얼마 전 <유퀴즈 온더 블럭>에 출연한 대장 항문외과 김익강 전문의는 본인을 '20년 동안 한 구멍만 판 똥꼬 의사'라고 소개했다. 많은 사람들이 항문 쪽에 질환이 생기면 부끄러워서 숨기곤 하는데, 실제로 병원 앞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만큼 환자들에게 심리적으로 문턱이 높은 검사이기에, 그는 자신이 불편한 자세를 취해 목 디스크에 걸리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환자가 편한 자세로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또, 검사를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자신의 얼굴에 환자의 변이 튀기도 하는데, 그 사실을 환자가 알면 민망하고 미안해할 테니 환자 몰래 얼른 수건으로 닦아내고 다시 검사에 임한다.
지난주, 나의 두 번째 책 <나답게 쓰는 날들>이 출간되고 주변에서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다. 설레고 기쁘다고 해야 정답 같은데 나는 의외로 무덤덤했다. 솔직히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을 받고도 이게 내 책인지 아닌지 실감이 나지 않았고, 일에 치여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일일이 전하지 못했다. 굳이 기분을 표현하자면, 회사에 출근해서 정말 한순간도 농땡이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후 퇴근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오늘은 왠지 집에 가서 다이어트 생각 않고 치맥 정도는 먹어줘도 괜찮을 것 같은 잔잔한 뿌듯함과 동시에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약간의 부담감이 느껴지는 딱 그런 기분. 책이 나오면 책을 꼬옥 끌어안고 표지에 쪽쪽쪽 하고 입을 맞추고 있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그저 나의 일을 할 뿐. 이런저런 기분들이 오고 가며 흘러가지만 그저 나의 일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무덤덤해진다. 물론 나도 잠깐 기쁨에 취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더 중요한 건 독자와 약속한 마감 기한에 맞춰 이 글을 써내는 일이고, 지난주보다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니까. 오늘도 그저 나의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의연하고 덤덤하게 글을 써내려가야지.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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