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예능 프로그램 <나혼자산다>에 출연한 개그맨 김해준 씨가 개그 아이디어를 짜기 위해 아무 목적지 없이 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았다. 맨 뒷자리에 앉아 휴대폰 메모장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적는 그의 모습 위로, 1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약 3시간 동안 강제적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을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벚꽃길이나 여름철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들을 멍 때리고 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튀어 나와 나 역시 휴대폰 메모장을 자주 꺼내들곤 했다.
버스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김해준 씨를 보며 가수 '코쿤'과 '키' 그리고 만화가 '기안84'도 비슷한 방법으로 아이디어를 발굴한다며 공감을 했다. 개그를 짜든, 노래를 만들든, 만화를 그리든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라면, 목적지 없는 버스에 올라타는 것과 같이 스스로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 '아이디어 회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팀원들을 모두 회의실에 앉혀놓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회의를 하자는 거였다.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싫었다. 물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주야장천 회의실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리라는 법은 없다. 아이디어 발굴은 혼자만의 사색에서, 그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기는 방법은 함께하는 회의에서 더 잘 나온다. 차라리 각 팀원들에게 3시간을 주고, 다녀오고 싶은 곳을 다녀온 뒤 각자 생각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면, 더 빨리 더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모이지 않았을까.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면 나는 회사 근처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다 외근 갔다 돌아오시는 대표님을 마주치곤 혹시 내가 근무 시간에 노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대표님들은 내게 필요하다면 더 자주 밖으로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한 마케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따라 나는 더 적극적으로 돌아다녔고, 돌아다닌 만큼 아이디어를 건의했다.
여유란, 목적이 없는 것. 목적지 없는 버스, 목적 없는 수다, 목적 없는 낙서에 여유가 있다.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는 회의실이 아닌 탕비실에서 어제 본 드라마를 이야기하다가 툭, 화이트보드가 아닌 카페 냅킨에 끄적거리던 낙서에서 툭 나올 가능성이 높다. 나는 재택근무를 시작한 후로 출퇴근하는 시간을 벌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유가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 효율적인 시간이 늘어난 만큼 '목적 없는 시간'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아도 하차벨 혹은 내리는 문과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반면 좋은 아이디어가 필요한 사람은 버스에서 내리기가 불편하지만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기 좋은 맨 뒷자리에 앉는다.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면, 가끔은 맨 뒷자리를 노려보는 것도 좋다.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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