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6)
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5편 먼저 읽기
누가 지금 '야옹’ 소리를 내었는가
시카고에 도착하자마자 지연님은 컨퍼런스 준비로 바빴다. 지연님이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4일 동안에는 대부분 나 혼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는데, 사실 체력이 저질이라 미국에 도착하고 이틀 동안은 시차 적응만으로도 벅찼다. 그렇다고 너무 에어비앤비 안에만 있기엔 시간이 아까워 컨퍼런스가 끝날 무렵 느긋하게 일어나 지연님과 같이 저녁이나 먹을 겸 컨퍼런스가 열리는 호텔에 가보기로 했다.
우버를 타도 되지만 우버만 타고 왔다 갔다 하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구글맵을 켜고 내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호텔까지 거리를 보니 도보로 약 40분이 소요된다고 나왔다. 자외선이 강하긴 하지만 걷기에 딱 좋은 거리였다.
사실 지연님은 도보를 추천하지 않았다. 혼자 길거리를 걸으면 위험할 수 있다고. 치안 상황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날이 밝은 오후 4시인데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연님의 조언을 따라 음악을 듣거나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오로지 걷는 데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햇살을 가득 품은 동네와 주변 집들이 예뻐 보였지만 워낙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맞은편에서 한 명이라도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은 마음과 아무 탈 없이 호텔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요란법석을 떨고 있을 때쯤, 건너편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고양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야옹~"
말로만 듣던 '캣 콜링(지나가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의 시끄러운 휘파람 소리 또는 성적인 발언)'이었다. 주변을 둘러 보니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나를 향해 내는 소리였고, 설사 나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들 내 귀에 들린다면 내게 하는 것이었다. 태어나 처음 당해본 일인 데다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라 건너편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숨까지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심보를 어찌 알겠냐만
뛰듯이 걷고 또 걷자 저 멀리 호텔이 보였고 나는 그제야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얼마큼 왔어?'라는 지연님의 문자에 마치 구조가 된 기분이 들었고, 저 멀리 호텔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자 10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어린 애처럼 징징거리며 방금 있었던 일들을 말하자 지연님은 그러게 왜 우버를 타지 않았냐며 놀란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나는 우버를 타지 않은 것이 후회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지나고 나면 아름답게 기억된다던가. 나는 혹시나 그런 일들을 겪을까 두려워 마을 주변을 걸어보지 못했다면 그것이 더 아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미국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의 인종차별적 행동을 당했다. 그리고 불안한 치안으로 인해 항상 긴장 상태에 있었다. 사람도 많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본인의 얼굴을 내 얼굴에 들이댄 남성 때문에 기겁할 듯이 놀랐고, 한 카페에서는 '토스트'를 주문하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는 직원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잠시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릴 때는 늘 모든 짐을 들고 내리거나 차 안의 짐을 꽁꽁 숨겨두어야 했다. 실제로 주차된 차들 중 유리창이 깨져있는 차들을 종종 목격했다. 왜 그런 일들이 무섭지 않고, 피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여행을 통해 내가 느끼고 보고 싶었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심하는 것과 주눅드는 것은 다르다. 얼마 전, '세대 차이'에 대한 주제로 글을 썼다가 악플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민감한 주제이므로 글을 쓰면서도 조심했는데 다양한 의견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악플을 본 지인들이 내게 '괜찮냐'고 물었는데,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닌, 글에 등장하는 사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글을 내려버렸다. 그건 예상치 못한 문제였다. 어쩌면 다시는 이런 주제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글쓰기의 방향이 아니다. 다시는 이런 주제로 글을 쓰지 않겠다는 마음보다는 다음 번에는 좀 더 다각도로 예상하며 내 생각을 써야겠다는 배움을 얻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고양이 소리를 내는 심보를 내가 어찌 알겠냐만, 나는 그저 걷고 싶은 길을 걸으며 아쉬울 것 없이 미국 여행을 즐겼다.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https://ww-letter.stibee.com/?stb_source=url&stb_campaign=share_page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