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5)
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4편 먼저 읽기
직원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CEO
이번 미국 여행에서 지연님이 꼭 해야 한다고 말한 미션이 두 개가 있다(지연님은 여행에도 미션이 있다). 첫 번째는 시카고에서 CSTA 컨퍼런스를 무사히 마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녀의 회사, 팝피즈 세일즈 담당자 '메간'을 만나는 것. 메간과는 약 3년 동안 온라인으로 같이 일을 했지만 한 번도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재택 근무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지연님에게 '직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실제로 한 직원은, 근무 시간에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지역으로 놀러 가다가 중요한 미팅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직원이 본인의 업무에 책임을 다하고 있고, 업무 진행 상황 시트를 공유하거나 정기적으로 미팅을 함으로써 자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협업에 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CEO로서 직원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재택 근무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간과 만나기로 한 날은 메간의 출산이 약 2주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몸이 편치 않은 그녀를 위해 우리는 메간이 사는 동네의 한 피자집으로 찾아가기로 했는데, 우리가 묵고 있던 에어비앤비에서 차로 약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지연님은 컨퍼런스 준비로 정신이 없던 상황에서도 앱으로 렌트카를 미리 예약해두었는데, 렌트카가 주차된 곳에 찾아가자 차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 약 1시간 가량 전화를 붙들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지연님은 메간을 기다리게 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다른 렌트카 업체를 찾아 겨우 차를 빌리고 출발했지만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긴 어려워보였다. 우리는 메간에게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남기고 시카고의 시골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숙소와 가까운 곳도 아니고 차로 1시간이 넘는 곳까지 함께 일하는 직원을 만나러 가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일까. 지연님은 출산을 축하하는 선물까지 미리 메간의 집으로 보내두었다.
지연님이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기 전까지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CEO라면 당연히 직원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고, 직원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항상 귀 기울여 주어야 한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대표님들이 내 어려움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면 서운한 감정부터 앞서기도 했다. 그런데 지연님과 함께 일하는 사이로서든, 지인으로서든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면서부터 그게 꼭 당연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라기엔 그녀가 맡고 있는 일과 책임의 무게가 너무나 컸다. 그녀의 수면 시간으로만 봐도 모든 게 당연하지 않았다.
언어적 장벽 때문에 메간과의 점심 식사는 조금 어색했다. 지연님이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When are you due?(출산 예정일이 언제예요?)" 멘트가 아니었다면 숨막히는 침묵을 지킬 뻔했다. 하지만 정말 어렵게 만난 사이인 만큼, 나는 이 만남을 미국 여행 중 디즈니랜드에 놀러갔던 것보다도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평생 처음 해보는 여행의 동반자
며칠 후,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고 지연님이 일하는 산호세 공유 오피스의 대표님과도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앤드류는 낯을 가리는 나도 단번에 긴장을 내려놓을 만큼 편하게 우리를 맞이해주었는데, 밥을 먹던 중 앤드류가 지연님의 얼굴이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일을 처리하며 여유가 많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창업 초기였던 때는 정말이지 지금처럼 여행을 할 만큼의 여유가 조금, 아주 조금도 없었다고 했다.
놀랍게도 이번 여행은 지연님이 '4x'년 중 평생 처음 해보는 여행이다.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아주 어렸을 때 가족들과 가본 여행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학창 시절엔 여러 나라를 건너 다니며 여러 차례 전학을 다니고, 미국에서 직장 생활에 창업까지 했지만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인증샷을 찍는,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여행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평생 처음 해보는 여행이라는 말에 나는 "에이~"라는 말부터 나왔지만 그녀의 여행 스타일을 보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여행 스타일은 일보다 더 빡세다(?). 앤드류를 만나기 전날, 우리는 금문교를 자전거로 횡단하고 밤새 최악의 근육통을 앓았다. 앤드류를 만나러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렌트를 하러 가기로 했으나 나는 죽어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결국 지연님 혼자 렌트를 해오셨다. 이토록 열정적인 뱁새의 여행 스타일을 따라가는 황새는 다리가 찢어질 지경이지만 그녀가 처음 해보는 여행의 동반자가 나라는 게, 그리고 나와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는 말이 나는 참 고마웠다.
"워낙 에너자이저이신 건 알지만 가끔 걱정이 돼요. 옆에서 많이 챙겨주세요."
지연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앤드류가 내게 해준 당부가 마음에 콕 하고 박혔다. 그러고보니 '지연님은 원래 에너자이저이니까'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긴 것들이 너무 많았다.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만큼 나도 그녀를 조금 더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는 걸, 미국 여행 내내 장을 볼 때마다 두 개의 짐 중 조금이라도 더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그녀를 보며 너무 늦게 깨닫고 있다.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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