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너무 'T' 아니에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이동수 작가의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라는 책을 동료에게 몰래 보여줬다. 회사에서 당당하게 꺼내 보여줄 만한 제목은 아니라서 마치 불온서적이라도 꺼내듯 가방에서 조심히 꺼내 보여주었다. 책을 본 동료는 제목이 너무 'T' 같다고 했다. 성격유형검사 MBTI에서 T와 F는 각각 사고형과 감정형을 뜻하는데, 좋게 말하면 '현실적인', 나쁘게 말하면 '감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T'라고 농담처럼 지칭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기 때문이다. 동료가 보기에 이 책의 제목은, 인생을 너무 현실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MBTI는 'F'이지만, 일에 있어서만큼은 'T'에 가까운 사람이라 그런지 나는 이 책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든다. 솔직히 말하면 회사원에게 꼭 필요한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이동수 작가는 'BC카드'에 처음 입사했을 때 이 책의 제목인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라는 문구를 자신의 책상 자리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꽤 보수적인 카드 회사에서, 그것도 신입 사원이? '깡'이 어마어마한 사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회사를 10년 가까이 다녀보니 회사는 참 신기한 곳이었다. 들어갈 때는 바늘구멍 뚫듯이 힘들게 비집고 들어가는데, 나올 때는 활짝 열린 대문으로 나올 수 있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에는 내 자리가 없어지진 않을까 조바심 떨며 일했는데 1년, 2년 다니다 보니 원래 내 자리였던 것처럼 모든 것들이 당연해졌다. 하루에도 백 번씩 회사가 좋았다가 싫었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때로는 온몸을 바치고 정도 들고 욕도 하다가 월급날이 되면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 회사는 인생의 작은 버전 같았다.
작은 인생 속에서 회사원은 고비를 만나기도 한다. 최근 A가 한 프로젝트를 위해 수개월간 뼈를 갈아 일했는데 윗분들의 결정으로 인해 무산되어 좌절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다해 준비한 일이 무산되면 누구라도 큰 허무함과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아무래도 '진심'을 더 많이 쏟은 사람일수록 그 좌절감은 더욱 클 것이다.
회사원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회사로부터 그에 대한 대가인 월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A는 여기까지 잘 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가 무산된다면 맥주 한 잔 쭉 들이켜고 깔끔하게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도 최고결정권자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물론 회사는 프로젝트에 열을 다한 직원에게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는 사람 중 하나는 회사 안에서의 계급을 자신의 권력으로 오해하는 사람이다. 책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에 나온 일화이다. 이동수 작가가 2년 차 계장 시절에 성과급이 나온 날이었다. 다들 '나는 얼마를 받았네', '작년보다 줄었네'하며 대화를 하는 사이에 성과급을 받지 못한 도급 직원이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대뜸 한 선배가 도급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들 다 받는 성과급도 못 받고, 억울하지 않냐?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해서 정규직으로 입사했어야지."
우리의 인생을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리자면, 회사원은 전체 인생의 부분집합이다. 아마도 그 선배의 벤다이어그램은 자신의 인생과 회사원으로서의 인생이 똑같은 크기이지 않았을까? 나의 전체 인생 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회사원으로서 잘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는 것은, 즉 자신은 자기 인생의 최고결정권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말이다. 무산된 것은 내가 아니라 프로젝트다. (내가 너무 T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