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모금을 남겨놓는 습관

[남겨놓기]

by 유수진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남겨놓기]



여름이 되면 항상 생수 한 병을 들고 다닙니다. 더위를 많이 타고 땀도 많이 흘려서 수시로 물을 마셔주어야 하기 때문인데요. 어릴 땐 그게 탈수 증세인지도 모르고 '내가 어지러움을 잘 느끼는가보다'하고 살다가 한 두 번은 큰 일이 날 뻔 하기도 했지요.


올해도 날씨가 금세 더워졌습니다. 몇 주 전부터 바깥 활동을 하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생수 한 병을 사서 들고 다녔는데요. 그렇게 며칠 지내다가 희한한 습관 하나를 발견했어요. 집에 돌아와 생수병을 꺼내면 물이 1/5 정도, 그러니까 딱 한 두 모금 정도가 남아있다는 겁니다. 까짓 거 그 정도 남길거면 후루룩 마셔버리거나 바깥에다 털어버리고 올 것이지, 도대체 왜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정도의 물을 남겨놓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았죠.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 모금의 물을 남겨두고 싶었던 거예요. 갑자기 심하게 목이 타거나 응급상황일 정도로 어지러운, 사실 이젠 잘 발생하지도 않는 상황에 대비해서요.


부엌 싱크대에 남은 물을 버릴 때마다 뭐하러 귀찮게 이 물을 집까지 들고 왔을까 생각하면서도, 다음날 역시 내 생수병의 물은 1/5이 남아 있어요. 한 다리 건너 편의점이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가방 안에 남아있는 한 모금의 물이 그게 뭐라고. 언제든 힘들고 지칠 때 당장 마실 수 있는 물이 내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참 마음의 위안이 돼요.


나는 소진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더 이상 쓸 글이 없고,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지는 것. 너무 지치고 탈진해서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상태가 오지 않았음 해요. 때때로 그런 상태를 겪고 한동안 가림막 커튼이 쳐진 방 안에 웅크려 앉아있는 때도 있지만, 결국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 건 남겨놓은 한 모금의 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너에게 남아있는 아주 작은 관심이 진심어린 대화를 다시 만들어냈고, 서랍 안에 무심히 던져두었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이 썩 괜찮은 글감이 됐고, 일기장에 끄적였던 낙서가 잠시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꺼내어볼 수 있게 한 것처럼요.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열정을 불태워도 모자란 세상에 무언가를 남겨놓는다는 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늘 가방 안에 남아있는 한 모금의 물처럼, 내가 정말로 지치고 힘들 때 마실 수 있는 물을 남겨두고 싶어요. 고작 한 모금의 물이 최악의 순간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오늘도 물 한 모금을 싱크대에 버렸습니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머나먼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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