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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 보이면 여기에 있는 거야

[아지트 만들기]

by 유수진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아지트 만들기]



산꼭대기에 오르느라 노곤해진 몸을 잠시 쉬이고자 우연히 한 작은 바위에 앉았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내 몸에 맞추어 만든 의자처럼 내 몸에 꼭 맞았고, 우리 동네가 엄지 손가락만하게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그 자리가 5성급 호텔보다 더 아늑하게 느껴졌거든요. 그 후로 10여 년 동안 산에 오를 때마다 늘 그 바위에 앉아 동네를 내려다보며 가빠진 숨을 돌렸어요. 나만의 작고 작은 아지트에서.


나에겐 몇 군데의 아지트가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혼자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내 몸은 어느새 아지트에 닿아 있어요. 우연히 찾은 숙소가 마음에 들어 다시 찾아갔고, 다음 번에 새로운 곳을 찾기 귀찮아 또 찾아갔더니 그곳은 이미 아지트가 되어버렸어요. 그 공간에서 나는, 10년 넘게 살고 있는 집보다 더 나다워졌고, 재방송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내 방에서와는 달리, 인생을 재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지트를 만든다는 건, 도저히 일상에선 버틸 수 없는 일을 피해 도망갈 곳을 마련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슬픈 일이기만 하진 않을 거예요. 마음이 무거울 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위로나 응원의 말보다 그저 내 엉덩이 붙일 작은 바위 하나, 세네 번 찾은 익숙하고 편안한 숙소일지도 몰라요.


나는 지금 한 아지트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름이면 입맛이 뚝 떨어지는 내가, 오랜만에 욕심부려 식사를 했고, 잔뜩 움추렸던 어깨의 긴장감을 살포시 내려놓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어 웃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종종 아지트를 찾을 거예요. 항상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지트를 생각하니 딱히 무서울 게 없네요. 무엇이 찾아온들 그땐 또 여기에 와서, 글을 쓰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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