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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오늘 처음 만난 사이 맞나요?

[처음 만난 사람과 친구되기]

by 유수진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처음 만난 사람과 친구되기]



폭염의 날씨에 서촌을 돌아다니다 뙤약볕을 피해 한 편집샵에 들어섰습니다. 머리핀도 찔러보고, 귀걸이도 대보며 즐겁게 가게 안을 둘러보던 중 사장님께서 '저녁은 어디서 드실 예정이세요', '아는 곳이 있는데 추천해드릴까요'하며 살갑게 말을 거셨고 우린 거기에 기분 좋게 맞장구를 쳤습니다. 물건을 구입하고 가게를 나서려던 찰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기 시작하더니 무섭게 소나기가 쏟아졌어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게 안에서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빗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야기의 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진해졌습니다. 나보다 열세 살이 더 많으신 사장님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친척처럼 친숙했고, 우린 서로 오래 알던 친구에게나 할 법한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이건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라며 조심스럽게 운을 떼기도 하고, 바깥에 비가 오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이 쉴 새 없이 웃으며 수다를 떨었어요. 4-50분 정도가 흘렀을까, 비가 멈추고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하고 짧은 수다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썩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나의 성향을 바꿔보고자 20대 때는 일부러 이런저런 커뮤니티에 나가보기도 했어요. 자율에 맡겨진 참석은 두 번 이상 넘어가기가 힘들었고, 그런 만남으로 이어진 인연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어요. 처음 만난 사람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게 불편했고, 어디까지 공유해야 적당한 선인지도 알 수 없었죠. 30대가 되어서도 이런 나의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일을 통해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과의 만남이 예전처럼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일을 통해 만났지만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에 일은 사라졌고, 처음 만난 사이라도 나이에 상관없이 편한 친구로 남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진정한 친구란 그저 나이나 알고 지낸 햇수와는 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드만 맞다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성별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살아온 처음 만난 사람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걸 낯가림이 심한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십대 남성의 인생 고민을 마주하며, 세 살이 어린 동생의 출산 후기를 들으며, 나는 분명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 친구가 됨으로써 나는 서른 한 살의 소심한 미혼 여성 외의 다른 시선으로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죠.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바에서 맥주 한 잔을 하던 중, 사장님도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우리의 자리에 합류하셨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아무런 약속도 없이 술을 마신 건 평생 처음이었고, 영화 속에서나 봐오던 이 순간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어느덧 늦어진 시간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고, 급하게 지하철에 올라타는 내 뒤로 사장님은 마치 내 오랜 친구처럼 귀엽게 손을 흔들어주셨어요. 저도 즐거웠어요, 사장님. 그런데 우리, 오늘 처음 만난 사이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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