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가기]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미술관 가기]
미술에 대해 아는 지식도 없고 흥미가 많은 편도 아니지만 일 년에 한두 번 미술관에 갑니다. 특히 더운 여름날엔 에어컨 바람이 무한 제공되는 미술관만큼 좋은 휴식처도 없지요. 넓직한 공간을 어슬렁거리며 미술 작품을 보고 있으면 왠지 미술의 조예가 깊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유치한 착각도 들고요.
미술관엔 보통 혼자 갑니다. 옆 사람의 움직임에 크게 신경을 쓰는 나로서는, 혼자일 때 더 그림에 집중을 잘할 수 있거든요. 물론 누군가와 함께라면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있지만 (보통 '다리가 아프다', '나가서 뭐 먹을까' 같은 수다에 가깝지만),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그림에게 3분 이상 시선을 내어주는, 이 흔치 않은 경험을 완전하게 느끼고 싶거든요.
최근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3분 이상 바라본 적이 있나요? 무엇이든 빠르게 움직이고 자극적이어야 사람들의 시선을 잡을 수 있는 영상의 시대에는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온라인으로 뉴스 기사를 보다가 양쪽에서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광고 때문에 급히 창을 내리거나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3초 이상 시선을 뺏기고 나면 왠지 진 것 같은 패배감마저 들어요. 원치않게 시선을 폭격당한 기분이랄까요.
글을 쓰려면 대상을 천천히 음미하듯 관찰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너무 배고파서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음식을 해치워버리고 나면 정작 맛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내 생각이든 어떠한 대상이든 작은 부분 한 톨까지 세심하게 표현하고 싶다면 관찰, 그리고 또 관찰이 필요해요. 어쩌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가는 이유도, 작가에게 필요한 관찰의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을지도 몰라요.
얼마 전 보고 온 미술 전시는 <베르나르 뷔페 展>입니다. 뷔페는 피카소의 '대항마'로 불릴 만큼 약 50년 동안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유지한 프랑스 최고의 아티스트였다고 하는데요. 그의 아내인 아나벨 뷔페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92점의 유화를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나는 '비스콘티 갤러리'라는 하나의 그림 앞에 멈춰섰습니다.
모리스 가르니에의 말에 따르면, 1950년의 어느 날, 피카소가 비스콘티 갤러리에 들어와서 다른 작품을 보지 않고 3분 동안 오직 이 한 작품만 보고 걸어나갔다고 했어요. 그 작품이 바로 여러분의 왼쪽 건너편에 있는 '닭을 들고 있는 여인'이에요. - <비스콘티 갤러리>, 1950 오디오 가이드 中 -
피카소가 비스콘티 갤러리에 들어와 다른 작품은 보지 않고 뷔페의 '닭을 들고 있는 여인'만 보고 나갔다는 에피소드를 듣고 대부분 '그 작품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바로 그때 오디오 가이드는 '그럴 줄 알았어'라는 듯 여러분의 왼쪽 건너편을 보라고 말합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비스콘티 갤러리' 그림을 벗어나 미술관 내 왼쪽 건너편에 걸려있는 '닭을 들고 있는 여인' 작품 쪽을 쫓아갔습니다. 그 순간, 과거에 사는 아나벨 뷔페와 함께 비스콘티 갤러리에 와 있는 듯한 이색적인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어요. 이같은 시선 뺏김이라면 백 번 천 번 당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오래도록 바라봤다는 그 작품 앞에서 오랜 순간을 머물다 발을 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