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Mar 19. 2020

그 많던 여자 선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꼭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서 볼 문제는 아니다

나는 그의 평정심에 또 한 번 눌렸다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는 날이 선다. 긴장감이 극에 달하고 배도 슬슬 아파진다. 긴장을 하면 말이 빨라지고, 말이 빨라지면 꼬이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질문을 받으면 그때부터 내 입은 내 의지밖이다. 그때, 한 남자 직원이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나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 그도 곧바로 핵심을 말하지는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하며 왜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 미리 체크하지 못했는지 설득하고 답변한다. 그것이 논리적이든 논리적이지 않든 급속도로 냉각됐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나는 그의 평정심에 또 한 번 눌렸다.


내가 중요한 자리에서 유독 긴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로 여성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는 ‘완벽주의' 때문이다. 완벽하게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꼭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서 볼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내_일을 쓰는 여자>의 저자 마셜 골드스미스는 사회생활 초반에는 남녀 간의 경험이 크게 다르지 않을  있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면 차이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여성에게서 가장 많이 보이는 잘못된 습관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업적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2.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내 성과를 알아줄 거라 기대한다.

3. 전문성을 과도하게 중요시한다.

4. 인맥을 형성하기만 하고 활용하지 않는다.

5. 첫날부터 지원군을 만들지 않는다.

6. 미래보다 현재 직무를 중요하게 여긴다.

7.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8. 착한 사람이 되려고 과도하게 노력한다.

9.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10.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11. 과거를 너무 되새김질한다.

12. 너무 많은 것에 신경 쓴다.   


여기서 당신에게 속하는 내용은 몇 가지인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나는 무려 7개의 습관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습관은 나의 업적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 ,  해도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내 입으로 내 자랑을 해요?


업무를 잘 수행하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수진님, 그 성과를 다른 동료들도 볼 수 있게 슬랙에 공유해주세요."라는 말을 여러 번 듣기 전까지는.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것을 굳이 내 입으로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겸손하지 못한 것 같고, 칭찬받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회사 입장에서는, 훌륭한 성과들이 많이 공유될수록 직원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 동료의 입장에서는, 다른 동료가 업무를 잘 수행한 덕분에 우리 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고 업무 팁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자신의 직속 상사조차도   없는 나의 성과를 전사적으로 홍보할  있다.


여성들은 남의 공적을 뺏으려고 하기는커녕 자기가 달성한 성과조차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기를 꺼린다. 또한 자기 잘못이 아닌 일에도 끊임없이 자책하고 사과하며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리고 모든 일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경향이 크다. - <내_일을 쓰는 여자> 중에서


승진 대상자를 뽑을  여성은 '과거 실적'으로 평가하지만 남성은 '잠재력'으로 평가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아직 해내지도 않은 일로 평가를 받는다고? 주어지는 업무를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나에겐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별 거 아니에요"라든지 "그거 금방 하죠?"라는 말이 오가면, 내가 하고 있는 업무의 크기가 그렇게 결정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과연 그 일이 정말로 '별 거 아닌' 가치 없는 일인지, '누구나 금방 할 수 있는' 일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그 일을 능숙히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기에 별 거 아닌 일인 양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는 한 시간에 걸쳐하게 될 일을 십 분만에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닌지.


죄송하다는 말을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을 하는 건지  


나와 함께 일했던 K는 회사에서 상대방을 극도로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충분히 도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밖에 못 도와드려서 죄송해요" 등 모든 말에 '죄송'이 붙었다.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나에게도 잘 맞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었다.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 한마디로 딱딱했던 업무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그 후부터 나 역시 '죄송하지만', '그건 OOO님도 생각해보신 부분이겠지만'을 무분별하게 쓰며 나를 낮추는 커뮤니케이션이 습관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완곡하다'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저 사람은 늘 죄송한 일을 만드는 사람이구나'라고 인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굳이 나를 낮추는 표현을 쓸 만큼 잘못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다른 표현으로 바꾸거나 하지 않는 게 좋다. 업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나를 깎아내리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필요는 없다. 세상의 어떤 리더도 '내 아이디어는 누구나 할 법한 아이디어예요.'라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확고하게 믿으니까 그들도 그렇게 믿는 것이다. 기억하라. 상대방을 혹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영업 기술이다. - <내_일을 쓰는 여자> 중에서

 



 단어를 꺼내기가 여전히 부끄럽지만, 나는 '야망' 있다. 가치와 보람을 느낄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이기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야망 있다고 하면 왠지 기회주의적으로 느껴질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나에겐 다행히도, 좋은 멘토가 있다. 게다가  멘토는 흔치 않다는, 여자 선배다. 그녀의 야망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진정한 야망을 가진 사람만이 가질  있는 ‘이라는  존재함을 배운다.  역시 언젠가 빛을 내는 ‘흔한여자 선배 중 하나로, 쟁쟁한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을 꿈꿔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썸머가 사랑했던 500일의 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