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Mar 15. 2020

썸머가 사랑했던 500일의 톰

영화 <500일의썸머>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썸머입니다. 결혼은 했고요. 톰은 같은 회사에 다니는 남자였어요. 물론, 지금의 제 남편은 아닙니다.


톰은 제게 첫눈에 반했지만, 영 새침데기인 것 같다는 친구의 말에 마음을 접은 듯 했어요. '예쁜 여자들은 다 그렇더라'면서요.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톰을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의 헤드폰에서 스미스의 곡이 흘러나왔고 그 곡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곡이기에 말을 걸었어요. 우리는 단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어요. 아마도 톰은, 그때 내게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우린 회식 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톰은 퍽 사랑을 믿는 사람이더군요. 그와 달리 전 사랑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믿었어요. 제가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거든요. 그런 골치 아픈 일을 겪을 바에 이 아름다운 도시를 즐기는 편이 더 낫다고 믿었죠. 그런데 그날, 톰의 친구가 술에 취한 나머지 폭탄 발언을 했어요. 톰이 저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말이죠. 톰에게 정말 나를 좋아하냐고 묻자, 그는 직장 동료로서 좋아하는 마음 정도로만 표현했어요. 우린 '친구'가 되기로 했죠.



다음 날 복사기실에서 톰을 또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를 보자마자 키스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그렇게 우린 가까워졌지만, 꼭 당부해야만 했어요. 진지한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요. 톰은 여느 남자와 달리 쿨하게 알겠다고 대답했어요. 천천히 가자, 고 하더군요. 그 후로 저도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던 것 같아요. 이전에 만났던 남자 이야기부터 살면서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톰에게 서스름없이 다 말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우린 마치 세상에 서로가 전부인 것처럼, 그야말로 사랑을 했어요. 그 당시 톰은 메시지 카드에 문구를 적는 일을 했지만 건축가를 꿈꿨어요. 저는 톰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했고요.



하루는 바에서 톰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웬 남자가 제게 치근덕거리며 다가왔어요. 바로 옆에 톰이 있는데도 말이죠. 상종할 가치 없는 사람이었고 저는 단호히 그에게 거부 의사를 표현했어요. 그러자 그 남자는 "정말로 저런 찌질한 남자(톰)를 좋아하냐"라고 했고, 톰은 갑자기 그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어요. 그 일로 인해 저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고, 톰은 저를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인데 도대체 왜 화가 난 거냐며 소리를 질렀어요. 우린 처음으로 크게 다투었지만, 저는 톰의 집에 찾아가 미안하다고 했어요. 전 그때도 여전히 톰을 무척 사랑했거든요. 그런데 과연 그날 톰이 주먹을 휘두른 게 정말 저를 지키기 위함이었을까요? 저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았어요.



그때부터였을까요. 우리 사이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어요. 톰을 만나도 더 이상 예전처럼 신나게 떠들고 싶지 않았죠. 그는 데이트를 하면서 종종 "다음엔 뭐 할까?"라고 물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진전되지 않았고 데이트 시간을 채우려 들어간 영화관에서 저는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어요. 영화관을 빠져나와서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저에게 톰은 "영화일 뿐이잖아"라고 했어요. 맞아요, 그건 영화일 뿐이었어요. 하지만 스크린에선 막 결혼식을 한 부부가 나왔는걸요. 결국 저는 톰에게 이별을 고했어요. 톰은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저와 친구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 묻는 메일에 묵묵부답이었어요.



얼마 후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올라탄 기차에서 우연히 톰을 만났어요. 톰은 저를 봤지만 못 본 체하더군요. 톰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했고, 그는 그동안 일이 바빠서 답장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저는 톰에게 커피 한 잔을 하자고 청했고 우린 다시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어요. 결혼식에서도 함께 춤을 췄고, 저는 그에게 훗날 저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했어요. 톰도 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친구로 남을 준비가 되어가는 줄만 알았는데, 제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고는 집에서 뛰쳐나가버리더군요.



톰과 사귈 때 자주 가던 벤치에 가보았어요. 역시나 그 자리엔 톰이 있었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 우연한 만남이었어요. 톰이 제게 물었어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 글쎄요, 다만, 지금 제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 어떠한 '우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어요. 제 남편은 톰이 선물해준 책을 읽고 있던 저에게 책의 내용을 물었고,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만났거든요. 만약 톰이 제게 책을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그 카페에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만날 수 없었을 거예요. 사랑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제가 틀렸고 진정한 사랑을 찾기 전까진 행복할 수 없다는, 톰의 말이 맞았죠.



제가 사랑했던 500일의 톰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미 우린 헤어졌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요.




<500일의썸머>는 커플에 대한 이야기지만 100% 톰의 입장에서만 설명된다. 왜 톰의 입장만 보여주어 썸머를 별다른 이유 없이 나쁜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생각해보면, 보통의 우리 연애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자기의 시선으로만 상대방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가장 가까운 줄 알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하니까. 썸머는 이기적인 여자가 아니다. 아니, 이기적인 여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톰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썸머가 무작정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다른 썸머가 쓴 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받지 못할 동백이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