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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y 25. 2020

'할많하않' 하게 하지 마세요

할 말은 하는 편에 속하는 나도 '할많하않' 할 때가 있다. '할말하않'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줄임말로, 구태여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쓴다. '할말하않'의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다. 두세 번 넘게 말해도 상대방의 행동에 변화가 없거나, 아무리 대화를 해도 도무지 접점이 없거나, 할 말을 잃을 만큼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입을 다문다.


약 15년 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봄여름철엔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농구장이 문제였다. 사람들이 농구장을 둘러싸고 있는 펜스에 대고 축구공을 차는데 그 소리가 정말이지 너무나 컸다. 펜스를 부술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심장이 두근거렸고, 당연히

집 안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어폰을 껴도 소용없고 시도 때도 없이 깜짝깜짝 놀라 소음에 쫓겨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


대부분 학생들이기 때문에 처음엔 이렇게 저렇게 아이스크림도 사주며 달래 봤다. "얘들아, 여긴 축구장이 아니잖아", "조금만 배려해줄 수 없을까?" 하면 아이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축구장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소음은 다시 시작됐다. 아이들은 소리가 크게 날수록 더 큰 희열감을 느끼는 듯했고 1년, 2년, 시간이 흐를수록 공을 차는 아이들의 힘은 더욱 세졌다.


'할말하않'은 침묵이 아니다. 침묵은 아무 말이 없는 것이고, '할말하않'은 쏟아지기 일보 직전의 말을 참아내는 것이다. 침묵은 고요하고 '할말하않'은 위태롭다. 쏟아부은 에너지에 쓸모가 없음을 느낀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므로. 게다가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해 돌려 돌려 말한다면? '할말하않'하게 하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힘이 든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을 때쯤, 관리 사무소에 몇 차례 연락한 끝에 결국 플래카드 하나가 농구장 내에 걸렸다. 아파트 주민들과 나로 인해 농구장에 플래카드가 걸렸지만, 내가 봐도 플래카드는 예쁘지가 않다. 플래카드가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는 상황은 더더욱 암담하다. 바깥 소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속으로 삼키는 말은 안으로 깊숙이 꾹꾹 눌러 담긴다. 


누군가 당신의 말에 대답이 없거나 말이 많던 사람이 조용해졌을 땐, 이미 플래카드가 걸려버린 상태는 아닌지 주위를 둘러보길. 다시 여름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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