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Dec 04. 2020

작업실을 얻고 처음 해본 일, 이를 테면 변기 청소

정말 부끄럽지만 지금껏 변기를 닦아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변기 청소는 늘 엄마가 했다는 뜻이고 나는 못된 딸이라는 뜻이다. 엄마는 평생 웬만해선 딸들 손에 물 묻히지 않으려고 했다. 설거지도 그냥 놔둬라, 손빨래도 베란다에 내다 놓아라,라고 했다. 어차피 시집 가면 지겹도록 할 일이라면서(왜?).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 대신 손에 물을 묻히지 않는 것이 편한 일이 아니라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쓰는 변기를 닦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전히 최악의 딸이었다.


작업실은 살림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빨래나 음식 조리를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피해 가지 못할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변기 청소였다. 요즘엔 워낙 좋은 아이디어 상품들이 많아서 위생적으로 변기를 청소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은 없지만, 주기적으로 '변기 청소할 때가 됐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할 거면 비켜'라고 하며 모든 것을 다 본인이 하려는 엄마가 없는 공간에서, 나는 하나하나씩 처음 해보는 일들을 늘려갔다.


공과금 내는 일도 그렇다. 나는 수도세나 전기세가 얼마큼 써야 얼마만큼의 금액이 나오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형광등이 2개 켜 있으면 무조건 1개는 끄라고 말하는 엄마가 절약 정신이 투철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작업실에 입주한 지 한 달이 흘렀을 무렵, 우편함에 꽂힌 관리비 내역서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아, 월세 말고도 낼 돈이 또 있었지, 하고 말이다. 납기일 내에 입금하지 않으면 2천 원 정도 연체료를 내야 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입금을 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얻고 나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늘 먹을 게 가득한 우리 집과 달리 작업실 냉장고엔 지금 물, 냉동 볶음밥, 핫도그, 마카롱, 맥주뿐이다. 먹을 게 필요하면 코앞에 있는 백화점 지하에 가서 딱 그 날치의 음식만 사 온다. 그것이 가끔은 불편하고, 가끔은 가볍게 느껴진다. 나에게 맞춰가는 일상이다. 20리터 쓰레기봉투를 혼자 채우려면 2주가 넘게 필요하다는 것도, 혼자 잠에서 깨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밥을 먹고살다가 픽- 하고 쓰러져도 (연락할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면) 아무도 모를 수 있다는 것도 몸소 소름 끼치게 느낀다.


말 그대로 작업(글쓰기)을 하려고 얻은 작업실인데, 한동안은 혼자 지내는 데 적응하기 바빴다. 오늘은 처음으로 작업실에서 혼술을 했는데, 혼술까지 했으면 적응 5단계를 넘어선 게 아닐까.


작업실에서 첫 혼맥
매거진의 이전글 30대 꿈의 공간, 작업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