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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Dec 21. 2020

우리가 지금 나눠야 할 진담

작업실에 있으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다. 누군가 말을 걸거나 집에서 나는 온갖 소음들이 온전한 휴식 혹은 작업의 흐름을 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보낸 날, 나는 내가 오늘 하루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무척 편안함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물을 끓여볼까~'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글을 쓰면서 문장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거나, 저녁거리를 사고 돈을 내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있을 때 보통 말이 많은 편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신입 시절의 근성이 남아서일까? 퇴근 후 맥주 한 잔 마시는 모임을 내가 주도해서 잡기도 하고, (사람들이 원하든 말든)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사회자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집에 가는 길에 술값을 N분의 1로 나누어 참석자들에게 정산까지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신나게 놀아서 힘이 다 빠졌다기보다는, 운동장 한 바퀴만 돌면 되는 계주 달리기에서 유독 나 혼자만 두 바퀴를 돈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술자리 모임에서 뿐 아니라 내 모든 일상의 태도였을 것이다. 약 1시간 동안의 면접을 마친 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 없나요?"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어떻게든 할 말을 더 쓸어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처럼 말이다. 빈 공간을 채우기 급급한 대화 방식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대화의 흐름을 읽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는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은 물론, 사람들과 진짜로 나누고 싶은 대화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작업실에서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화를 나눌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니 대화의 빈틈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혼자 대화를 나누다 보면 뜬금없이 옛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순간에는 별생각 없이 행동하고 지나갔던 일들이 사실은 내 나름의 의미가 있었음을 되새기기도 한다. 그렇게 대화의 깊이는 무르익어가고, 비로소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자신과의 대화가 끝나면 친구를 작업실로 초대해 술을  잔씩 한다. 시끄러운 이자카야였다면 시답잖은 수다를 떨다 헤어졌을 텐데, 작업실에선 잔잔한 음악 bgm 깔아놓고 진솔한 대화에만 집중한다. 다음날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술에 진탕 취하고 나서야 가능할 법한 '서로의 장점 이야기하기' 작업실에선 맥주   만으로도 술술 나오곤 하는데, 부끄러운  하지만 내심 둘 다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은 평소에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는 이런 말들이 우리가 지금 나눠야  진담이 아닌가 싶은데, 말을 하지 않고서야 그것을 느끼고 있다.

유리잔에 와인을 마시며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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