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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r 25. 2021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줄게

핸드크림을  때마다 엄마 까지 하나  샀다. 거칠거칠해진 손을  때마다 마음이 쓰였는데, 엄마는 매번 핸드크림을 사다줘도  쓰지 않았다. 틈틈이 핸드크림을 발라주면 좋으련만, 어차피   묻힐 텐데 비싼 핸드크림을 발라서 뭐하냐고만 했다.


그런데 내 손도, 요즘 물 마를 날이 없다. 핸드크림 바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든 일이냐고 했던 내가, 독립된 공간을 얻은 후에야 엄마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손이 좀 거칠어진 것 같아 핸드크림을 바를라 치면 설거지 거리가 눈에 보이고, 설거지를 다 하고 나면 방바닥 걸레질을 해야 하고, 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오면 어차피 또 손을 씻어야 하니까 자꾸만 핸드크림을 안 바르게 되는 것이다. 피부 노화에 예민한 편이라 스무살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마자 제일 열심히 산 것도 화장품인데, 끝도 없는 집안일 앞에서 피부 노화 따위는 뒷전이 된다.


나 자신보다 함께 쓰는 공간을 먼저 생각했을 터. 나야 혼자 사니까 내가 치우지 않으면 대신 치워줄 사람이 없으니 피부를 희생해서라도 집을 치우는 것이지만, 엄마는 늘 다른 가족들보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웠다. 손에 물이 많이 닿은 만큼 당연히 다른 가족들보다 더 피부가 거칠어졌고, 내가 심심할 때마다 바르던 핸드크림이 엄마에게는 어차피 물에 씻겨 내려갈 번거롭고 미끄러운 물건이었을 것이다.


90년 대에 남자들의 흔한 프로포즈용 대사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줄게"였다고 한다. 고된 집안일은 본인이 하겠다거나 아니면 번거로운 일을 대신 해줄 물건이나 서비스(ex.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를 사주어서 고생 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프로포즈 때 한 그 약속이 실제로 결혼 후에도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웃기는 소리로만 들렸던 그 말이, 이제는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라는 말보다 꽤 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손에 가급적 물 안 묻히고 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독립된 공간을 얻어보고서야 알게 됐으니 말이다.


집에서 내가 설거지 좀 할라치면 엄마는 장난처럼 "걸리적 거리지 말고 저리 가"라며 나를 싱크대에서 밀어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주려는 엄마 덕분에 그동안 내 손이 촉촉하고 뽀송하게 잘 지켜져 왔음을 안다. 독립 후 코딱지만한 작은 공간을 관리하면서도 금방 손이 거칠어져 버렸으니 엄마 손은 오죽할까. 안 바른다고 해도 열심히 핸드크림을 사다가 엄마 가방에 넣어놔야겠다. 생각난 김에 나도 한 번 더 바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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