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크림을 살 때마다 엄마 것까지 하나 더 샀다. 거칠거칠해진 손을 볼 때마다 마음이 쓰였는데, 엄마는 매번 핸드크림을 사다줘도 잘 쓰지 않았다. 틈틈이 핸드크림을 발라주면 좋으련만, 어차피 또 물 묻힐 텐데 비싼 핸드크림을 발라서 뭐하냐고만 했다.
그런데 내 손도, 요즘 물 마를 날이 없다. 핸드크림 바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든 일이냐고 했던 내가, 독립된 공간을 얻은 후에야 엄마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손이 좀 거칠어진 것 같아 핸드크림을 바를라 치면 설거지 거리가 눈에 보이고, 설거지를 다 하고 나면 방바닥 걸레질을 해야 하고, 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오면 어차피 또 손을 씻어야 하니까 자꾸만 핸드크림을 안 바르게 되는 것이다. 피부 노화에 예민한 편이라 스무살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마자 제일 열심히 산 것도 화장품인데, 끝도 없는 집안일 앞에서 피부 노화 따위는 뒷전이 된다.
나 자신보다 함께 쓰는 공간을 먼저 생각했을 터. 나야 혼자 사니까 내가 치우지 않으면 대신 치워줄 사람이 없으니 피부를 희생해서라도 집을 치우는 것이지만, 엄마는 늘 다른 가족들보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웠다. 손에 물이 많이 닿은 만큼 당연히 다른 가족들보다 더 피부가 거칠어졌고, 내가 심심할 때마다 바르던 핸드크림이 엄마에게는 어차피 물에 씻겨 내려갈 번거롭고 미끄러운 물건이었을 것이다.
90년 대에 남자들의 흔한 프로포즈용 대사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줄게"였다고 한다. 고된 집안일은 본인이 하겠다거나 아니면 번거로운 일을 대신 해줄 물건이나 서비스(ex.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를 사주어서 고생 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프로포즈 때 한 그 약속이 실제로 결혼 후에도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웃기는 소리로만 들렸던 그 말이, 이제는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라는 말보다 꽤 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손에 가급적 물 안 묻히고 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독립된 공간을 얻어보고서야 알게 됐으니 말이다.
집에서 내가 설거지 좀 할라치면 엄마는 장난처럼 "걸리적 거리지 말고 저리 가"라며 나를 싱크대에서 밀어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주려는 엄마 덕분에 그동안 내 손이 촉촉하고 뽀송하게 잘 지켜져 왔음을 안다. 독립 후 코딱지만한 작은 공간을 관리하면서도 금방 손이 거칠어져 버렸으니 엄마 손은 오죽할까. 안 바른다고 해도 열심히 핸드크림을 사다가 엄마 가방에 넣어놔야겠다. 생각난 김에 나도 한 번 더 바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