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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Sep 27. 2020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속마음

얼마 전 등산을 하다가 벌레에 두 방을 물렸다. 날씨를 즐긴다고 가만히 앉아있었기 때문. 산 벌레는 워낙 독해서 옷 위로도 무는 데다 물린 부분이 아주 크고 매섭게 부풀어 오르는데, 한 번은 도대체 어떤 놈이 물었는지 어질어질 현기증까지 난 적이 있다. 그래서 등산을 할 때 웬만하면 낮은 지대에서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다. 땀냄새가 선크림이나 트리트먼트 향과 섞여서인지 자꾸 벌레들이 꼬이기 때문이다. 물리지 않으려면 계속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삼성카드 광고에서 배우 유해진 씨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캐셔 분이 "통신사 카드 있으세요? 멤버십 카드 있으세요?" 하며 각종 카드가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왔다. 이러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는 나로서도 그런 카드를 잘 활용하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유해진 씨의 속마음이 내레이션으로 깔렸다.


삼성카드 광고 캡처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이후 이 대사는 여러 예능 프로그램이나 SNS에서 다양하게 패러디하여 '게으름'을 표현할 때 종종 활용되곤 했다. 그런데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속으로는 사실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그 일을 의도적으로 더 심하게 안 함으로써(?) 반항하고 싶은 마음 아닐까. 만약 정말 게으른 사람이었다면 '아무것도 안 할 것이다'라고 못을 박거나 '내일 해야지'하며 뒤로 미루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라고, 심지어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지는 않을 것 같다.


항상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은 취업 준비생 시절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 1 이력서를 제출해야 '내일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 희망을 품고 잠들  있기 때문에 1 1 이력서는  나름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매일 이력서를 제출할 만한 공고가 있었겠는가. 채용 공고를 찾지 못한 날이면 심한 우울감을 느꼈고, 이처럼 1 1 이력서를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 '해야 한다' 강박관념을 가졌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도 ' 써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글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강박관념이 일상적으로 자리 잡히면 가만히 앉아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 채찍질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푹 쉬면 될 것을,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계속 바람을 갖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입병이 나는 이유다.


게으름이라는 벌레에 물릴까 봐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 덕분에, 결국 취직도 하고  많은 프로젝트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조차 내려놓고 공활한 가을 하늘을 즐길 줄 아는 여유도 필요하다. 1일 1 이력서도 중요하지만, 이미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당근을 주는 것도 중요하니까. 까짓 거, 벌레 한 방 정도 물린다고 죽지 않는다(물론 등산하실 때는 온몸을 옷으로 잘 싸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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