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등산을 하다가 벌레에 두 방을 물렸다. 날씨를 즐긴다고 가만히 앉아있었기 때문. 산 벌레는 워낙 독해서 옷 위로도 무는 데다 물린 부분이 아주 크고 매섭게 부풀어 오르는데, 한 번은 도대체 어떤 놈이 물었는지 어질어질 현기증까지 난 적이 있다. 그래서 등산을 할 때 웬만하면 낮은 지대에서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다. 땀냄새가 선크림이나 트리트먼트 향과 섞여서인지 자꾸 벌레들이 꼬이기 때문이다. 물리지 않으려면 계속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삼성카드 광고에서 배우 유해진 씨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캐셔 분이 "통신사 카드 있으세요? 멤버십 카드 있으세요?" 하며 각종 카드가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왔다. 이러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는 나로서도 그런 카드를 잘 활용하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유해진 씨의 속마음이 내레이션으로 깔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이후 이 대사는 여러 예능 프로그램이나 SNS에서 다양하게 패러디하여 '게으름'을 표현할 때 종종 활용되곤 했다. 그런데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속으로는 사실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그 일을 의도적으로 더 심하게 안 함으로써(?) 반항하고 싶은 마음 아닐까. 만약 정말 게으른 사람이었다면 '아무것도 안 할 것이다'라고 못을 박거나 '내일 해야지'하며 뒤로 미루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라고, 심지어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지는 않을 것 같다.
항상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은 취업 준비생 시절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일 1 이력서를 제출해야 '내일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잠들 수 있기 때문에 1일 1 이력서는 내 나름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매일 이력서를 제출할 만한 공고가 있었겠는가. 채용 공고를 찾지 못한 날이면 심한 우울감을 느꼈고, 이처럼 1일 1 이력서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도 '글 써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글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강박관념이 일상적으로 자리 잡히면 가만히 앉아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 채찍질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푹 쉬면 될 것을,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계속 바람을 갖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입병이 나는 이유다.
게으름이라는 벌레에 물릴까 봐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 덕분에, 결국 취직도 하고 많은 프로젝트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조차 내려놓고 공활한 가을 하늘을 즐길 줄 아는 여유도 필요하다. 1일 1 이력서도 중요하지만, 이미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당근을 주는 것도 중요하니까. 까짓 거, 벌레 한 방 정도 물린다고 죽지 않는다(물론 등산하실 때는 온몸을 옷으로 잘 싸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