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을 잡을수록 별로인 이유

by 유수진

회사에서 종종 카피를 쓴다. 어떤 분들은 회의실을 잡고 2시간 동안 같이 앉아서 아이디어를 내보자고도 하시는데, 개인적으론 그렇게 해서 무릎 탁 치는 카피가 나온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해보자고 하시니 처음엔 2시간 동안 같이 앉아 있다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회의실에 갇혀 있을 땐 생각나지 않던 카피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복도에서 갑자기 정전기를 일으키듯 머릿속을 스쳤다. 잊어버릴 새라 얼른 회의실 문을 열고 카피를 외치자 모두들 "그거다!" 하며 무릎을 탁 쳤다.


그런데 다음 날, 한 분이 "그런데 그 카피..." 하면서 걱정되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제기했다. 맞는 말이었다. 한 가지를 걱정하기 시작하니 두 가지가 걱정되고 세 가지가 걱정됐다. 결국 카피를 수정해야 했는데 수정하면 수정할수록 기존에 쓰던 카피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은 없는 카피가 되었다.


배우 조정석 씨가 화면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야, 너두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영어교육업체 '야나두'의 광고는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나 역시 일대일로 정신 교육(?)을 시켜주는 듯한 카메라 무빙과 멘트 때문에 15초 동안 감사한 마음으로 팩트 폭행을 당하며 이 광고를 봤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인식된 만큼 이 광고는 성공적이었고, 실제로 통장 잔고가 11만 원뿐이었던 야나두를 급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광고는 원래 야나두가 계획했던 TV광고용 영상이 아니었다. 제작비 1억 원을 투자해 7시간 동안 찍은 본편은 따로 있었고, 이것은 카메라 감독이 급 제안한 바이럴용 영상이었던 것이다.


30분 만에 구상하고, 10분 만에 짠 카피로 완성된 이 바이럴용 광고는 페이스북에서 조회수 100만 뷰를 기록하고, 수만 회의 공유를 일으켰다. 야나두는 계획을 빠르게 수정해 이 영상을 TV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출처 : 김민철, <야 너두 할 수 있어>)


[야나두X조정석] 바이럴 영상 광고


각을 잡을수록 위험해지고 있다. 각을 잡기 위해서는 틀을 만들고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만드는 동안 소비자의 니즈와 입맛은 또 한 걸음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MoTV 출연한 월간디자인의 전은경 편집장의 말처럼, '신중할수록 손해'가 되어버린 시대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주 작고 빠른 실험, 그리고 가벼움이다.


과거에는 장기전에 특화된 '끈기'가 중요한 역량이었다면, 요즘은 단기전에 특화된 '즉흥성'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케팅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일의 개념이 다양해지고, 개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 지금, 자기 자신에게 맞는 일이나 관심사를 찾을 때에도 즉흥성이 필요하다. '해보고 아니면 그만(빠른 수정)'이라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한쪽 발을 슬쩍 들이밀어보는 것이다. 그러다 두 발 푹 담글 곳을 찾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에세이를 쓸 때에도 자잘한 퇴고는 많이 할지언정 초고의 큰 주제와 구성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퇴고를 하면 할수록 첫 느낌만큼 생생한 느낌이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숙성해야 더 맛있는 음식이 있는 반면, 팔딱팔딱 뛰는 갓 잡은 생선처럼 신선해야 더 맛있는 음식이 있다. 카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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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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