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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l 22. 2018

좋은 일만 보고 듣기에도 모자라죠, 그런데 말입니다

타인의 불편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  

고등학생 때부터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프로그램 특성상 살인 사건을 많이 다루는지라 마치 공포영화를 보듯 이불 속에 숨어서 보곤 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면 일상 속에서 봐오던 밝고 깨끗한 세상의 이면을 보게 된다. 지나가지 않던 유흥가의 골목길에 잘못 들어선 기분이랄까. 특히 충격적인 에피소드를 본 다음날에는 괜히 주먹을 꽉 쥐고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며 밤길을 경계하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며칠이 지나면 경계심이 또 풀리지만, 매일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숨이 막혀 죽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작년,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태국 파타야 살인사건' 에피소드를 방영했는데,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에피소드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개발자를 꿈꾸는 스물 다섯의 젊은 청년이 아무것도 모른 채 태국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처참히, 라고 표현하기에도 모자랄만큼 안타까운 죽임을 당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CCTV에 찍힌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그 모습을 본 나는 마치 밧줄로 몸이 묶인 듯 한동안 TV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도 쉽게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 에피소드는 남의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아니 충분히, 내 이야기가 됐을 수도 있고 나와 가까운 지인의 이야기가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온몸에서 열이 나고 소름이 돋았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내 친구의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었을까,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 같다. 그 사실이 나를 더 화나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런 나에게 정신 건강에 좋지 않으니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지 말라고 했다.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며칠동안 우울하고 슬픈 감정이 남아있었으니, 아예 보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시청한 이후로 <그것이 알고 싶다> 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다시는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또 다시 TV앞에 앉아 남의 불편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삶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고,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픈 이야기가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그 사실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남의 불편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무의식중에 피해오던 세상의 이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바쁜 현실을 살아가다보면 남의 불편한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게 수고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35도의 뜨거운 여름날 패딩을 입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길거리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때로는 버겁고, 무겁게 느껴진다. 내 일만 생각하기에도 벅차고 좋은 이야기만 듣기에도 모자랄 인생인데, 굳이 다른 사람의 불편한 이야기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세상에도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작년 '태국 파타야 살인사건'을 다룬 1년 후의 이야기를 방영했다. 다른 사람의 불편한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일은 편치 않은 일이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믿음이 생긴다. 비록 며칠동안 꿈자리는 조금 사납겠지만, 그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고 싶다. 타인의 불편한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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