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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Aug 19. 2018

허니버터칩은 꼭 맛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웬만해선 새로운 과자는 입에 대지 않는 문턱 값이 높은 사람

그라노베터의 모형에 따른 허니버터칩 사고실험을 돌이켜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허니버터칩이 꼭 맛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구매의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것은 처음 이 연쇄를 촉발하는 '씨앗seed' 역할을 할 '공짜로 시식하고 맛좋다고 이야기할 사람들'과, 사람들의 문턱 값이 중간에 틈이 없이 연속적으로 늘어서 있다는 조건뿐이다. - 김범준, <세상 물정의 물리학> 中


"오늘 허니버터칩 들어왔나요?"

"몇 개 들어왔다가 금방 다 나갔어요. 내일 다시 와보세요."


'허니버터칩'이 대유행이던 2014년, 회사 동료들과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사실 나는 허니버터칩이 뭔지도 잘 몰랐고 관심도 별로 없었는데, 따분한 회사 생활 중 '허니버터칩 찾기' 놀이는 꽤 모험심을 일으키는 행위같아 동료들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한참 허니버터칩을 찾아다니던 중 허니버터칩을 먹어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들려오자 동료들의 모험심은 더 불타올랐다. 누군가는 살면서 먹어본 과자 중 가장 맛있다고 했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맛이 없어서 실망했다고 했다. 너무 상반된 의견이 나오니 나도 그 맛이 궁금해지긴 했다.


하지만 내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맛이 있어도 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사람이 많은 맛집은 기피하고, 백만 명이 넘게 봤다는 <명량>이나 <7번방의 선물> 같은 역대 흥행 영화에도 왠지 흥미가 가지 않는다. 대다수가 인정했다면 그 맛집의 음식은 맛있을 게 분명하고, 영화는 꽤나 재미있게 볼 확률이 높겠지만 왠지 모르게 너무 과하게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무언가에는 슬며시 발을 빼게 된다. 즉 나는 이 세상에 100명이 있다고 가정할 때, 허니버터칩을 먹어본 사람이 2명만 돼도 '나도 한번 먹어봐야지'라고 생각하는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라기보다는 100명 중 90명 이상이 허니버터칩을 먹어봤다고 해도 웬만해선 새로운 과자는 입에 잘 대지 않는 할아버지 입맛, 문턱 값이 높은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이렇게 호기심이 저하된 이유는 아마도 몇 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유명한 카페라고 해서 찾아가봤더니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기만 하고 핫하다는 (셀카용) 솜사탕 음료 맛도 그저 그랬다. 페이스북 피드를 보다가 요즘 뜨는 관광지라고 해서 찾아가봤더니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지 않아 몇 분만에 금방 자리를 떴다. 너무 실망한 나머지 차라리 늘 가던 카페에 가서 늘 마시던 바닐라 라떼를 마시거나 이전에 가봤던 마음에 드는 관광지를 다시 한 번 찾아가는 편이 더 나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만큼 좋았던 적도 많다. 그러나 나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과하게 사람들이 몰리는 무언가에서 얻는 기쁨보다는, 우연히 나에게 잘 맞는 무언가를 찾았을 때 얻는 기쁨이 훨씬 더 큰 것 같다. 10년 전, 부산 여행에서 맛집을 찾아가겠다며 하루종일 쫄쫄 굶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무 음식점에 들어가 허겁지겁 먹은 곰탕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아무 기대없이 본 <레인오버미>라는 영화는 내 평생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허니버터칩의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내 평생 과자가 이렇게 열풍을 일으킨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과자 하나 먹겠다고 매일 편의점에 들러 사장님과 허니버터칩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으니 허니버터칩의 흥행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리고 몇달 후, 허니버터칩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어느 날, 동네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가 산처럼 쌓여있는 허니버터칩을 발견했다. 꽤 맛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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