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없다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는 낭랑 18세 소희는 춤을 좋아하는 씩씩하고 당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추천해 준 고객 콜 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되면서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사무직 여직원이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고객들로부터 매일 욕설과 폭언을 듣고, 동료들과 숨 막히는 경쟁구도 속에서 지내야 하는 회사가, 오로지 성과만으로 등급화되는 콜센터 업무가 목을 조여오는데...
게다가 유일하게 잘 대해주던 팀장이 자살하면서 소희는 그야말로 멘탈이 붕괴된다. 회사의 부조리함을 유언으로 남긴 팀장. 사람이 죽었는데... 어제까지 함께 호흡하고, 함께 밥을 먹던 상사가 죽었는데... 대기업 하청업체인 콜센터는 직원들에게 어떠한 말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각서에 사인을 받고 푼돈을 쥐어준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소희 역시 외압에 못 이겨 각서에 사인을 하고, 이후엔 완전히 달라져 이 바닥에서 버티기로 다짐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양심도 의리도 저버린 마당에 실적 1위 달성해서 인센티브나 두둑이 챙기자. 결국 소희는 1위를 달성하고, 새로 온 팀장에게 인센티브를 요구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어이없게도 다음과 같다.
"실습생들은 금방 그만두니까, 한 두 달 후에 인센티브를 지급해 줄게. 그냥 보험 들었다고 생각해. 안 그만 두면 어차피 소희 씨 돈이야." 그래도 이곳에서 살아보려고 했는데... 회사의 선 넘는 부조리함에 소희는 절박하게 말한다. "나 회사 그만 두면 안 돼?" 그러나 누구도 이 말에 응답하지 않는다. 가장 친한 친구도, 이 회사에 추천한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도, 심지어 아빠, 엄마까지도...
"막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보고만 있었냐고." 오랜만에 복직한 형사 유진.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 여고생의 자살 사건을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자취를 쫓는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언젠가 마주쳤던 두 사람의 이야기. 우리는 모두 그 애를 만난 적이 있다. 2023년 2월 8일 개봉작.
2017년 전주 콜센터 실습 여고생 자살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다음 소희>. 불편하지만 꼭 알아야 할 우리 모두의 이야기.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스토리는 반전 없이 예상대로 흘러갔고, 예상대로 끝이 났다. 그렇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138분이라는 러닝타임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입력이 좋았다. 영화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희'라는 인물에 대해 충분히 설명됐고, 현재 처한 상황에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어 '소희'를 이해하게 됐고, 소희와 함께 분노했으며 슬퍼했다. 그리고 소희의 죽음 이후, 콜센터도, 학교도, 교육청도,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이라 시인하는 사람이 없는 기막힌 현실에 형사 유진과 함께 분노했고,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유진과 함께 좌절했다. 사실 소희의 죽음은 모두의 잘못이 아닌가. 정식 직원이 아닌 현장 실습생들을 과도하게 경쟁시켜 이득을 챙기고, 온갖 술수를 써서라도 급여를 깎는 부조리한 회사도, 다른 학교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현장이 어떻든 취업을 시키고 보는 고등학교도, 취업률이 떨어지는 것만 신경 쓰느라 눈물로 그만두길 원하는 제자의 눈물을 외면하는 담임교사도, 그리고 딸이 대기업(사실은 하청에 하청에 하청업체)에 취직한 것 자체만 좋아서 절절히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딸의 말을 못 들은 척 한 부모까지... 우리 모두가 소희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아닌가. 어쩌면 너무도 현실과 닮아 있어서 이토록 몰입이 잘되었는지도 모른다. 불편하지만 꼭 알아야 할 우리 모두의 이야기. 시대정신이 담긴 스토리.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꼭 이 영화를 보시길 권한다.
처음엔 제목이 입에 붙지 않았다. 다음 소희. 오히려 영어 제목이 더 직관적으로 와닿았다. 넥스트 소희.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제목이 더할 나위 없는 적절한 제목이 아니었나 싶었다. 지금도 존재하는 다음 소희, 다음다음 소희, 그 다음다음 소희들... 더 이상 다음 소희는 없게 막아야 한다는 유진의 다짐, 기성세대 우리 모두의 다짐.
진짜 이 언니, 매력 무엇. 생얼도 진짜 생얼로 나온다. 여배우라면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길 바라기 마련이지만 배두나는 다르다. 사실 오랜만에 복직해 매일 밤낮없이 사건 수사하러 다니는 형사가 잠잘 시간도 없는데 풀메이크업을 하고 다닌다면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그래도 여배우들은 으레 그렇게 나온다. 보는 관객들도 여배우의 이미지가 있으니 그러려니... 한쪽 눈 질끈 감고 봐 준다. 근데 배두나는 달랐다. 비비도 채 바르지 않은 것 같은 리얼 생얼에 잠을 못 잔 듯 퉁퉁 부은 얼굴과 눈까지... 제대로 살렸다. 평소 알아주는 패셔니스타로 통하는 배두나가 메이크업과 패션을 버리니 배우 배두나는 가고, 형사 유진이 성큼 다가왔다. 배두나의 연기력 또한 훌륭했다. 처음 사건을 맡았을 때 형식적인 느낌으로 수사하는 유진도, 점차 진실을 파헤쳐 가며 분노하는 유진도, 언젠가 스쳤던 소희의 죽음을 어른으로서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유진도, 다음 소희는 없어야 하겠기에 소희의 친구들을 챙기는 유진도 과하지 않게 잘 소화했다.
배두나뿐 아니라 타이틀 롤, 소희 역을 맡은 김시은의 연기력 또한 너무 좋았다. 초반 씩씩하고 당찬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도, 프로페셔널하게 추지는 못하지만 춤을 진짜 열심히 추는, 그 무엇보다 춤을 사랑하는 모습도, 콜센터에 실습을 가서 열심히 하려던 어리바리 신입의 모습도, 부조리함에 치를 떨며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며 눈물짓는 모습도, 스스로 저수지에 몸을 던지기 전 처연히 하늘을 바라보던 그 모습도... 김시은은 소희 그 자체였다. 괴물 신예가 탄생한 느낌이다.
영화 <다음 소희>의 네이버 평점은 8.74로 꽤 높다. 나 역시 10점 만점에 9점을 주고 싶다. 1점은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고 예상대로 흘러간 것 같아서 뺐다. 그것 말고는 전체적으로 모든 면에서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스토리의 구성도 자연스러웠고, 모든 씬에서 감정을 과하지 않게 절제하면서도 담담히 현실을 바라보게 만드는 연출도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주연 배우인 배두나와 김시은은 물론이고 조연 배우들 역시 연기 구멍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각 인물에 대한 서사도 A-Z까지 구구절절하게 표현하지 않은 점도 좋았다. 많은 인물들 중 가장 많은 설명을 한 소희도 춤을 좋아한다는 것, 콜센터에서 벌어지는 일과 그로 인한 감정변화를 제외하고는 구구절절 개인사를 소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부모님과의 에피소드도 극히 제한된다. 유진은 더욱 그렇다. 직업이 형사라는 것, 오랜만에 복직했고 현재 잠시 형사과에 있으며 여기엔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 가끔 춤을 배우러 간다는 것 정도가 유진에 대한 설명의 전부다. 유진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면 사실 유진의 분노에 관객들은 깊이 공감하지 못할지 모른다. 유진이 소희의 사망 사건에 열정을 쏟는 것이 개인의 감정, 원한을 해소하는 것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유진은 소희와 잠시 춤 연습실에서 스쳤던 인연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사연이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희의 사망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 형식적으로 무미건조하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을 파헤칠수록 드러나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 분노하게 되고, 기성세대로서 소희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다음 소희는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동분서주하게 된 것이다. 한 명의 기성세대인 관객들은 이런 유진을 보며 공감하게 되고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게 된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딜 아이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사회를 물려주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깨어서 노력하고 싶다. 그 방법은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리라.
# 기성세대 (30대 이상)
# 청년세대 (20대)
# 그래도 조금은 공평한 세상을 꿈꾸는 자
# 어제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사회를 물려주고 싶은 자
# 넷플릭스 가입되어 있는 자
# 지금 이 글을 본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