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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갓선생 Dec 18. 2024

의문(疑問)

장례식이 끝나자 집 안에는 깊은 정적만이 남았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이불 한 구석의 매듭처럼 옅은 온기로 남아 있을 뿐, 사람들의 위로와 애도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혜원은 비어버린 거실 중앙에 서서, 딸의 부재가 가져온 생경한 공기를 호흡했다.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성공 가도를 달리며, 늘 단단한 모습으로 가족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던 딸이 이렇게 허망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혜원은 한 발짝씩 딸의 방으로 걸어갔다. 문 안쪽에는 깔끔히 정리된 책상, 가지런히 놓인 노트와 펜, 정확한 분량으로 남겨진 문서들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불안한 흔적은 없었다. 서랍을 열어봐도 예리한 단서나 암울한 기록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모바일 기기, 노트북, 소셜네트워크 계정—이 모든 것을 뒤져봐도 그저 평범하고 빈틈없는 일상이 펼쳐질 뿐, 딸이 품었을 법한 고통의 그림자를 엿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혜원은 목이 콱 막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딸은 변호사로서, 그리고 공직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일상은 빼곡한 일정으로 가득했으나 딸은 한 번도 힘들다, 어렵다, 견디기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온라인 기록 어디에도 “살기 힘들다”는 토로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을 남긴 흔적은 없다. 그저 바쁘게, 성실하게, 주어진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던 사람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혜원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만약 딸이 무언가를 암시하고,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면, 슬프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저 웅크린 미로 속에서 빛 한 줄기 찾기 어려운 형국이었다. 청사진처럼 깔끔한 데이터와, 고요한 방 안에서 혜원은 딸의 결심을 설명할 길을 잃었다. 마치 딸이 스스로 만든 외견상 완벽한 삶 속에 진실한 심정 하나 내비치지 않고 떠나버린 것 같았다.

혜원은 한동안 딸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손끝으로 딸이 남긴 베갯잇의 주름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녀가 이 자리에서 잠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상상하려 했다. 하지만 상상은 허공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모든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진 채, 딸이 헤아렸을 불안, 압박, 혹은 절망에 대한 어떠한 징후도 찾을 수 없었다. 이렇듯 완벽히 감춰진 내면이 있을 수 있는지, 혜원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복도 쪽 창문 너머로 희미한 저녁 빛이 스며들었다. 혜원은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던 딸, 누구보다 절제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삶을 운영하던 딸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그 창밖 어둠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메아리 같았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단서가 희미하기만 했다.

“대체 무엇을 느꼈던 거니?” 혜원은 낮게 중얼거리며 다시금 딸의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텅 빈 기록들과 공허한 주소록, 업무 지시사항 정도만이 무미건조하게 남아 있었다. 딸이 살아온 세계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이었나. 어딘가에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흔들었던 감정이나 불안을 드러낸 순간이 있었을 텐데, 혜원은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혜원은 알게 되었다. 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딸은 어떤 이유로 완벽히 절제된 삶을 유지하며, 마지막 순간마저 철저히 흔적을 지워버렸다. 혜원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더 깊이 파고들어야만 했다. 가시적인 단서 없이도, 삶의 조각들을 맞추어 딸이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내야 했다. 딸의 돌연한 죽음에 대한 충격은, 이제 혜원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탄탄한 경력을 쌓으며, 명문 대학 진학부터 시험 합격, 고위 공직 진출까지, 모두가 인정하는 능력과 성취를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을까? 혜원은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이유를 찾기 위해 딸이 남긴 기록을 뒤졌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메신저 기록, 소셜네트워크 계정… 이 모든 것을 샅샅이 살펴봐도 딸이 품었을 법한 불안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그녀의 내면은 완벽히 봉인된 서류철 같았다.

그 순간, 혜원은 오래전 교실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창밖으로 낙엽이 조용히 쌓이는 늦가을 어느 날, 아이들은 조용히 AI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고, 교사인 자신은 지식 전달자가 아닌 조력자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효율과 성취가 높아진 시대, 모두가 만족하는 듯한 교육 환경. 그러나 딸의 죽음을 겪고 나니, 혜원은 그때 보지 못했던 어떤 균열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딸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성취를 이어왔지만, 그 과정에서 이상하리만치 ‘우연한 행운’이 거듭된 사실이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한 번쯤은 운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딸의 삶에는 그런 불가해한 행운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었다. 과학 경시대회에서 대회 질문과 노트 속 문제의 완벽한 일치가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대학 입학 시험, 사법시험 합격, 고위 공직 선발까지 마치 기막힌 행운이 거듭 그녀를 도왔다.

혜원은 그 우연의 연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두 번이면 노력과 재능, 그리고 약간의 운으로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반복되는 행운은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딸은 자신이 노력한 대가로 얻은 성공이라고 믿게끔 주변을 안심시켜왔지만, 정작 딸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의문은 딸의 죽음 이후 더 묵직해졌다. 일상 속에서 아무리 단서를 찾아도, 딸의 내면을 가늠할 수 있는 작은 틈새조차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 혜원의 가슴을 짓눌렀다. 완벽해 보이던 기록들, 효율적으로 정리된 노트, 단정한 통신 기록, 깔끔한 스케줄표, 빈틈없이 관리된 대인 관계. 모든 것이 이상할 정도로 흠잡을 데 없었다.

혜원은 딸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 무언가를 기대어왔을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성으로 납득하기 힘들며, 딸이 굳게 묵비했던 관계나 도구, 아니면 시스템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딸이 남긴 흔적은 너무나 완벽히 조정된 것 같았고, 오히려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그 사실 자체가 혜원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녀는 딸의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다시 살폈다. 메시지나 기록에서 딸이 감정을 토로한 흔적은 없었고, 특수한 어플리케이션이나 문서도 없었다. 오히려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된 이 ‘행운의 패턴’을 설명할 만한 어떤 링크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완벽한 공백이 혜원에게는 가장 불길하게 느껴졌다. 딸이 기댔던 ‘무언가’를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고의로 지워버리거나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혜원은 무겁게 한숨을 쉬며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낙엽은 여전히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어긋난 행운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뒤에 어떤 손길이 작용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딸이 세상에 남긴 것은 완벽히 관리된 성공 기록뿐이었지만, 그 뒤에는 인간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제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혜원은 뒤늦게나마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준비를 했다.

희미한 불안감과 결심이 뒤섞인 이 순간, 혜원은 딸의 삶을 다시 조각내어 맞추어보겠다고 다짐했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웃어넘겼던 순간들, 정교하게 예측되었던 상황들, 엄청난 경쟁률 속에서도 항상 정확히 문이 열렸던 기회들… 이 모든 것을 연결지어, 딸이 떠난 이유를 밝혀낼 선명한 실마리를 얻어내리라. 뚜렷한 증거 없이도, 혜원은 절박한 마음으로 이 불가능한 퍼즐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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