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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갓선생 Dec 07. 2024

단서(端緖)

장례가 끝난 뒤, 집 안은 깊은 적막에 잠겼다. 경찰이 건넨 유품들이 작은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딸이 마지막 순간까지 소지했던 것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매끈한 검정색 스마트폰이었다. 빛을 반사하는 화면은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혜원은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그것은 딸이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물건이었다. 그녀의 삶과 죽음의 비밀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무게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스마트폰 화면이 켜지자 차갑게 막아서는 잠금 화면이 나타났다. 안면 인식을 통해서만 열리는 보안 시스템이었다. 딸의 얼굴을 더 이상 빌릴 수 없다는 사실이 혜원의 손을 떨리게 했다.

경찰은 유족들을 위한 잠금 해제 정책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절차를 밟기 위해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스마트폰은 책상 위에서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무거운 비밀을 품은 채 침묵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듯했다.

마침내 스마트폰의 잠금이 해제되었을 때, 혜원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화면에 나타난 것은 텅 빈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딸의 스마트폰은 거의 초기화된 상태처럼 보였다. 기본 어플리케이션 몇 개만이 남아 있었고,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삶의 조각들이 담겨 있을 것이라 믿었던 메시지와 기록은 모두 사라진 듯했다.

혜원은 전화번호부를 열어보았다. 등록된 번호는 몇 개뿐이었다. 문자 메시지 기록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주고받던 메신저 대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 외의 대화는 전부 삭제되어 있었다. 이것이 원래 딸이 사람들과의 교류를 최소화했던 삶의 방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삭제된 흔적일까?

딸은 고위 공직자로 일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을 것이다. 변호사로서도 그녀는 늘 바쁘고 사회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스마트폰 속 기록이 이렇게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경찰은 그녀가 사용하는 다른 등록된 전화기가 없다고 보고했지만, 혜원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딸이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다.

스마트폰 속 어플리케이션 목록을 하나씩 확인하던 중, 혜원은 익숙하지 않은 아이콘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플리케이션이었다. 어플리케이션의 이름은 짧고 모호한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순한 이름이었지만, 그 의미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혜원은 한동안 망설였다. 손끝이 화면 위에 머물렀다. 이 앱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것이 어떤 답을 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아이콘을 눌렀다. 화면이 어두워지며 무언가가 로드되기 시작했다. 마치 스마트폰이 천천히 자신이 품은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앱은 곧 그녀를 거부하듯 잠금 화면으로 돌아갔다. 어플리케이션은 안면 인식이 필요한 듯 보였다. 딸의 얼굴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딸의 얼굴을 더 이상 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무겁게 다가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앱은 스마트폰 속에 자리 잡은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 혜원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앱스토어를 통해 확인해보니, 이 앱은 특정 회사에서 개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회사의 이름은 낯설었고, 검색해도 구체적인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좌절했다. 이 앱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딸의 죽음과 이 앱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직감은 점점 강해졌다.

그녀는 손에 잡히는 단서 하나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아이콘의 차가움은 마치 닿을 수 없는 문 너머의 진실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앱은 열리지 않았고, 그녀의 의문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날, 혜원은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사물일 뿐이었지만, 마치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스마트폰 화면이 갑자기 깜빡였다. 혜원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한가운데 낯선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으로부터 삭제되었습니다.”

메시지는 너무도 짧았다. 화면에 몇 초간 머물렀던 그것은 이내 사라졌다. 혜원은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다시 확인하려 했지만, 메시지는 더 이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삭제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삭제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혜원은 화면을 조작하며 메시지를 추적하려 했다. 그러나 스마트폰 속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화면에 나타났던 흔적조차 지워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남긴 파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딸의 죽음과 이 앱, 그리고 이 메시지가 서로 얽혀 있다는 확신이 혜원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모든 퍼즐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붙들었다.

혜원의 시선은 다시 앱 아이콘으로 향했다. 화면 속에 조용히 박힌 그것은 마치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 들어갈 수 없는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혜원이 알고 싶은 모든 것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딸이 그토록 숨기고자 했던, 혹은 누군가가 그녀 대신 숨겼던 그 비밀의 조각들이.

혜원의 손은 화면 위에서 잠시 망설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시작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직감은 점점 강해졌다.

혜원은 그 앱을 다시 한 번 열어보려 시도했다. 그러나 화면은 여전히 그녀를 거부했다.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열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혜원은 다짐했다. 메시지, 앱, 그리고 사라진 딸.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혜원은 그 고리를 붙들고, 풀어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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