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진이가 뒤척이는 것을 토닥토닥하며 바라보다 문득 마음 속에 하나의 두려움이 떠오른다.
아이히만과 같은 극단적인 무사유가 아니더라도
부모로서 교사로서 보이는 나의 성실이 나중에 보니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무언가가 되는 것은 아닐지.
가르치고, 보여주고, 제안하는. 양육과 교육을 하다보면 뒤따르는 많은 행위들.
나의 자녀와 나의 학생에게 애정을 가지고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얼마전 집에서 와리스 디리의 수기(사막의 꽃)를 읽고 있는데 와리스 디리의 생애를 다른 책을 통해 알고 있던 윤이가 관심을 가지고 다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엄마, 와리스 디리의 부모님은 좀 너무한 것 같아요. 딸의 몸을 저렇게 아프게 하다니. 더구나 위생적이지도 않은 방법으로 할례를 받게하고. 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정말 나빠.”
와리스 디리의 부모는 그들이 살고있는 문화권 안에서 할례를 행하고 그렇게 처녀성을 유지했다는 증거를 몸에 지닌 채 결혼을 하는 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그 딸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 그들의 문화에서 한걸음 걸어나와 밖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무지에 바탕을 둔, 왜곡된 성관념에 의한 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내가 속한 문화안에서 나의 상식을 바탕으로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노력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그러한 나의 선택에 현재까지는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10세, 2세의 두 딸.
교사의 가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교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나의 학생들.
두려움이 몰려온다.
왜 끊임없이 생각해야하는지
왜 하나의 생각에 갇히지 말아야하는지.
그들은 나를 늘 긴장시킨다.
바로 보기. 깨어 있기. 본질을 바라 보기.
영향을 끼치는 크기가 어떠하든 나의 최선이 저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길.
그 두려움을 기억하고 언제나 사유하길.
~해야한다의 당위를 가르치지 말고 각자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사 그리고 부모가 되길.
2019년 7월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