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연에 대한 소고(小考)
나는 애초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혹자는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해 언제 끊었냐고 물어본다. 학창 시절 수많은 친구들이 담배를 피웠지만 나는 끝까지 피우지 않았다. 한 모금도 빨아 본 적이 없다. 간접흡연은 수없이 했다. 나의 폐에 혹여나 니코틴의 흔적이 있다면, 밀폐된 노래방에서 그렇게 뿜어되던 친구들의 담배 연기였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왜 그리도 고집스럽게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는가. 건강에 나쁘다는 각인이 머릿속에 되어있었기도 하고 외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신 기억도 한몫했을 거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나쁘다는 걸 알지만 담배를 피운다. 어떤 점에서 나는 담배를 안 필 수 있게 되었고, 또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들은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게 되었을까.
나에게 어떤 의지가 있길래 담배를 피우지 않을까. 이건 어떻게 보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선호, 호감의 문제일 수 있다. 좋아하지만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힘을 들여 담배를 끊었다면 그건 ‘의지’이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고 담배 자체를 싫어했으니 이건 어찌 보면 의지가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당연히 좋은 것,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거와 같은 거다. 그러니,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선호의 문제다.
그렇다면 나는 왜 담배를 선호하지 않는가.
건강에 좋지 않다. 외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길래 담배를 선호하지 않나.
어찌 보면 담배가 가져다주는 편익을 모르기 때문일 거란 생각도 든다. 담배 한 모금 빨아 당겼을 때 돌아오는 쾌감, 휴식, 안정감, 편안함. 나는 한 번도 그 담배의 위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호기심에 느껴본 사람들은 대개 술이 그렇듯, 담배의 효능에 빠져드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술 한 모금의 효과는 안다. 기분 좋게 취해서 잠들어버리는 상황도 좋고, 모든 걸 잊고 싶어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시고 하루를 멍하니 보내 버리는 것도 좋다. 술기운에 쌓여있던 울분을 토해 내는 것도 좋고 용기를 가지고 고백하고 앞장서는 것도 좋다. 술의 효능을 알 듯, 담배의 효능 또한 알았다면 내가 이렇게 담배를 멀리 할 수 있었을까.
술을 처음 먹을 때 이 쌉쌀한 것을 왜 먹냐며, 커피를 처음 마실 때도 이 쓴 맛을 왜 좋아하냐며 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담배 또한 첫 경험은 쓰디쓰겠지만, 그래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겠지만, 이내 익숙해지고 나면 한 모금 길게 빨았을 때, 다가오는 쾌감, 편안함이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담배 한 모금을 빨아볼까,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철옹성처럼 쌓아온 나의 금연 의지가 오히려 글을 쓰면서 꺾이는 기분은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왜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그러게 왜 안 피웠지 생각하며 한 번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자리를 잡는다.
의지를 가지고 담배를 피우지 않은 게 아니라 그 맛을 몰라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걸까. 갑자기 의지가 흔들린다. 의지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