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은 사람을 좀먹는 일이었다. 내용만으로도 사람을 질식시켰다. 내가 처리한 심의위만 오롯이 100건이었으니 사건 접수는 그 10배인 천건을 훨씬 넘었다. 내가 생산하고 접수한 공문말이다. 관내 초중고 수가 119개. 학교폭력 사건을 혼자 도맡아 했으니 학폭실에서 누군가가 죽어나갈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나일것만 같아 나는 두렵고 괴로웠다. 장학사는 10급이니 어쨌든 버티는 게 답이라는 동료 장학사들의 말을 허투루 들었던 게 후회되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서로 시비가 붙어 욕을 나누는 것은 엄연한 언어폭력이 되어 중대사건이 되었고, 오빠가 여동생을 오랫동안 성추행한 사건에서 엄마는 오빠편을 들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법정대리인이 동일한 사건에서 처분 통지서와 진술서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곤혹스러웠다. 엄마 몰래 여동생을 전학시키고 사는 곳을 숨겨야만 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약과였다. 여중생 친구는 자신의 친구에게 포주 노릇을 했다. 아파트 복도, 옥상에 남자를 보내고 만나게 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돈을 상납받았다. 심의위에 불려나온 그 학생은 한치의 양심도 없이 태연한 얼굴이였다. 그런 것은 또 약과였다. 친구를 무리 속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예사였다. 밤새도록 얼굴을 담뱃불로 지지고, 강제로 술을 먹이고, 때리고 그 적나라한 진술서를 읽고 있노라면 나는 세상 모든 것과 단절되어 있는 듯한 학폭심의위실에 혼자 앉아 괴로워했다. 학폭실에 정말 고민과 고통을 나눌 동료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심의위가 교육청으로 옮겨오는 과도기 속에 미처 인원을 채워넣지 못한 교육청의 사정으로 나는 덩그러니 학폭실 심의위 담당 장학사로 혼자 남겨졌다.
그렇게 일에 치여 가는 동안 조직은 나에게 오직 인사를 잘하고 보고를 잘하는 장학사만이 승승장구할 수 있다며 인사와 보고를 강요했다. 인사를 하지 않고 보고도 하지 않는 잘난 장학사라며 앞으로 길고 긴 장학사 생활 잘하는 지 두고 보겠다고 협박도 했다. 나는 솔직히 인사할 맛이 나지 않았다. 보고할 내용은 차고 넘쳤지만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과 부서장은 이해해주지 않았다. 일이 정말 너무 많은데, 초과근무를 매일같이 하는 데도 사건은 끝이 없이 밀려왔다. 오롯이 나만 바라보는 일들이.
매일 9시 근무 시작과 함께 걸려오는 전화와 한번 통화에 길게 이어지는 화난 목소리를 듣다보면 밥맛도 입맛도 세상 살 맛도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폭력 사안조사서의 학생들이 그저 안타까웠고, 심의위에서 울고불고 괴로워하는 학부모들을 바라보는 것도 고통이었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피해학생은 기절을 하기도 하고, 더 지나서 목숨을 던지는 일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면 그 원인이 꼭 사건 처리를 잘하지 못한 나 때문인 것 같아 괴로웠다. 교육전문직이라는 장학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더 참을 수 없었다. 근무시간을 훌쩍 넘겨 심의위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가벼운 건에서 중대한 건까지 20건 넘는 학폭사건이 접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그랬다. 도대체 세상 사람들은 학교폭력이 이렇게 존재한다는 걸 알기나 한걸까? 이렇게 심각하다는 걸 도대체....심의위가 끝난 즉시 조치결정통보서를 작성해야 했다. 회의를 다시 복기하며 심의위원의 말을 논리적인 문장으로 고쳐내고 학생이 왜 이런 조치결정을 받게 되었는지를 적어 가다보면 흡사 나는 법률사무소 사무장인 듯 판사인 듯 얼추 반 법조인이 된듯한 알 수 없는 지위가 일년 내내 혼동스러웠다.
그 해 나의 장학사 신입 1년차는 오직 학교폭력 사건이 4주 안에 밀리지 않고 처리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사활을 건 한 해였다. 인원이 보충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살아나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오기로 버텼다. 안하면 안되는 것이었으니까. 아침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던 그 날 딱 하루 병가를 내었다. 밥은 입에 갖다 대기만 한 날이 쌓이니 체중은 점점 빠졌다. 원하는 대로 처분을 받지 못한 가해자는 닥치는 대로 소송을 걸어댔다. 아무 힘없는 장학사에게까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나는 경찰서에서 3시간이 넘는 경찰조사를 받아야 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과 참담함을 느꼈다. 차라리 열심히 일하지나 않았으면 억울하지나 않았다. 적극 행정은 개뿔이다. 나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남편은 주말이면 만신창이가 된 나를 위해 늘 드라이브를 시켜주었다. 그 때 의령으로 왔다. 화정소바에서 매콤한 비빔소바를 시켰다. 조직에 대한 불신과 사람에 대한 배신과 각종 나쁜 감정들로 위염이 일상었던 나는 늘 속이 메스꺼웠던 터였다. 그 날 먹은 비빔소바는 너무 맛있었다.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비로소 허기졌던 몸과 마음이 채워지는 듯했다. 양념까지 싹싹 긁어 먹으며 맛있다고 연신 눈을 크게 뜨는 나를 남편은 안쓰럽고도 흐뭇한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의령 장날의 소박한 북적함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교육지원청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꽈배기와 떨이로 마감하는 과일 몇 바구니와 찐옥수수를 사들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그 때부터 의령이 내 마음에 담겼는지도 모르겠다.
의령으로 발령이 나자마자 나는 남편과 함께 방을 잡으러 바로 출동했다. 오는 그 날 방이 하나 났다고 해서 계약을 하였다. 방이 서동에 있는데 가볼려고 하냐는 부동산 업자의 말에 여기서 몇 키로나 가야하냐고 물었던 게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서동과 동동 끝까지 2키로도 되지 않을 듯 하니까. 지금은 웃음만 난다.
그렇게 의령으로 오고, 스타일 멋진 주무관님을 옆에 두는 행운과 매주 기다려지는 팀장 회의를 만들어주는 과장님과 존재만으로도 아우라가 느껴지는 소녀같은 웃음이 많은 교육장님과 함께 나는 의령이 더 좋아졌다.
행복 사우나에서 바디로션을 등에 처벅처벅 스스럼없이 발라주는 할매들과 함께 사우나도 즐기고, 의령 골프랜드에서 골프도 3개월 입문했다. 3만 5천원에 구찌 티 나는 신발을 파는 가게도 찾았고, 언젠가는 꼬꼬통닭의 똥집튀김으로 맥주도 한 잔 해야지 하는 버킷리스트도 챙긴다. 소리없이 무겁게 내려앉은 의령의 눈내리던 새벽도 따뜻하다는 것, 저녁 산책을 할 때는 똥을 밟지 않게 길 한가운데로 다녀야만 하는 것도 알았다.
나는 이렇게 의령을 알아가고 있다. 앞으로 의령에 남을 시간, 의령에서 맞이할 봄과 여름이 삶을 다시 설레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