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바바 Dec 21. 2023

보이차를 마십니다.

학교폭력 업무를 담당하며 단 5분도 폭력이 아닌 일을 접하는 시간은 없었다. 걸려오는 모든 전화와 걸어야 하는 모든 전화의 내용은 다 '폭력적'이었다. 하루 10시간이 넘는 학교폭력 사무를 하면 그야말로 몸과 마음과 사고 전부가 너덜너덜해지는 데 주말조차도 사건 해결(?)을 위해 두뇌는 멈추지 않았다.


급증하는 심의위 요청의 갯수를 줄여보기 위해 도교육청은 관계회복지원전문가 정책을 마련하였다. 심의위의 매뉴얼은 단순 절차였고 학생들은 처리되어야 할 일에 불과하였다. 심의위가 끝나고 조치결정(서면사과부터 가해자 전학까지) 통보를 받은 피, 가해자 모두 그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피폐해져갔다. 학폭문제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나는 조정이나 회복 목적의 해결 방식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얼만큼의 잘못을 했다는 형량 조정의 재판정이 더이상 아니기를 바랐다.


우리 청에 배정받은 관계회복지원전문가님은 오히려 나에게 구세주같은 존재였다. 주무관 하나 없는 사무실에서 말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소통창구였다. 전문가님이 오던 날 마침 함께 고등학교에 관계회복을 위한 조정을 할 참이었다. 고등학생의 학폭 사안은 대학 진학과 맞물려 시작부터 쌍방 가해를 주장하며 진흙탕 싸움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결정이 나든 피가해자들의 몫일뿐이었다. 게다가 담임이든 교장, 교감이든 선생이랍시고 섣불리 나섰다간 누구 편을 든다는 오해로 정말 소송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장학사랍시고 오지랖을 떨었다. 매뉴얼에도 존재하지 않는 조정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게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업무를 미뤄두고 늦은 저녁 피, 가해자측과 각각 약속을 잡아 만나기로 하였던 것이다. 서로의 요구 사항이 잘 맞추어 진다면 학교장 종결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뿐이었다. 한 껏 독이 올라있는 양쪽을 홀홀단신 만난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 때 전문가님의 존재는 너무 고마웠다. 학폭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객관적인 한마디를 내어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양쪽의 요청 사항을 경청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함께 합의하는 조정을 무사히 끝내고 난 후 나는 그동안 나의 참았던 눈물을 전문가님에게 쏟아내었다. 나도 모르게였다. 학폭업무를 하는 선생님들, 장학사님들, 민원에 시달려온 교감샘님들 그 모두는 예외없이 가슴에 울분을 담고 있을 터였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전문가님은 장학사라는 사람의 난데없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 누구 하나 위로해 주지 않았던 업무의 고달픔을 들어주었다.


고마웠다.


전문가님의 소개로 보이차 모임을 다니게 되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을 돌아보고 한 번쯤은 쉬어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더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살기 위해 보이차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보이차가 주는 안온한 기운. 청차가 건네는 상쾌한 위로. 홍차에 담긴 달밤의 향기. 이름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한 보이차의 세계에 나는 조금씩 빠져들어 가고 있다. 2년 째다.


그런 꿈도 꾼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나를 찾아오는 심신이 지친 이들에게 아주 맛난 보이차를 내어줄 계획 말이다. 차실도 만들고 차방도 만들어서 지도가 필요한 학생에게 아니 위로가 필요한 학생에게, 그리고 선생님에게 내가 팽주가 되어 차담을 나누는 꿈이다.


겨울이 짙어가는 한 밤. 

보이차를  우려낸다. 숙차의 짙은 탕색은 누군가의 눈물.

아직은 너무나 서툰 팽주.

그래도 우리.. 차 한 잔 할까요?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선생이 되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