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희생과 노고에 감사하며
아침 눈을 떴다. 가만히 배를 만져본다. 임신 7개월 하고도 7일째, 배는 그 주 수의 평균적인 크기를 훨씬 넘어 부풀어 있다. 오늘도 소변을 보는 게 편치 않다. 아니 노력해도 양이 그저 조금이었다. 그런 병이라고 했다. 혈압이 높아지고 서서히 신장 기능이 망가지면서 소변이 줄어들고 그렇게 몸에 물이 쌓이면서 부종이 생기면 급기야 폐에도 물이 찰 것이라고. 혈압 조절이 틀려 먹어서 몸의 장기가 제 기능을 차차 못할 것이라고. 그러니 이 모든 것의 근원인 ‘임신’이라는 상황을 중지해야만 산모가 살 수 있다고. 그것은 다르게 얘기하면 내 뱃속에서 하루라도 빠르게 아이를 꺼내야 한다는 것의 다른 말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 태아를 제거해야 한다는 지극히도 이기적인 생명의 본질이었다. 생물이란 것은 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렇게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니, 가만. 이 꼬물거리는 것이, 나의 배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나의 분신을 더 이상 가만두면 안된다는 것이라고? 그럴 순 없었다. 나도, 내 아이도 살아야 하고 살려야 한다. 나는 슬픔의 봇물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강한 매듭으로 꽁꽁 묶어두었다. 울지 않았다. 아니, 생애 처음으로 뭔가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건 내 안에 있는 나의 아이와 함께 결정하는 것이었다.
종일 면회 한번 되지 않는 중환자실 앞에서 남편은 마냥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기다렸다. 병실에서 아무 생각 못하고 그저 천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나는 밖에 누가 있는지 뭘 하다가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친정 엄마가 알려주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남편의 정성도, 사랑조차 아무 기대도 의미도 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오직 병실 침대 위에서 뱃속의 이 아이와 대화하며 두 시간에 한 번씩 주사를 맞으며 하루를 또 하루를 보냈다.
엄마가 된다는 건 내 모든 걸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걸 나는 그 때가 되어 알았다. 내가 아니고 너만이어도 된다는 그런 최고의 이타성이 내 존재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그래서 세상의 모든 모성은 어떠한 비난도 감수할 수 있는 그래서 더 비난할 수 없다는 피에타 그 자체라는 것을.
아들은 무사히 세상에 태어났다. 1.5 킬로그램의 건강한 아이로. 나도 다시 태어났다. 엄마로.
머리에 제 몸 길이와 비슷한 주사 바늘을 꽂고 가만히 인큐베이터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부종으로 부풀어오른 내 몸이사 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소변줄이며 링거줄이 주렁주렁 달린 네 몸이나 챙기라며 엄마는 성화였지만 그저 저 아이와 내가 무사히 이 병원을 나서게 된 것만이 충만한 기쁨을 줄 뿐이었다. 스물 아홉 임신중독증으로 첫 아이를 조산한 어미는 그리도 아무 생각없이 기쁘기만 했다. ‘아이야, 너도 살고 나도 살았다. 우리 잘 해내었다.’ 아이는 내 생각에 동의하듯 꼼지락거렸다.
군대를 간 아들은 종종 나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하고는 그 나이 때 젊은이들처럼 인생을 고민하며 묻는다. 어떻게 뭘 먹고 살아야할지를. 그럴 땐 난 가만히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넌 뭐든 할 수 있어. 네가 태어난 거 자체로 넌 이미 기적을 보여줬으니까.
- 세상의 모든 엄마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은 그 자체로 기적입니다 -